[기획특집] 미국, 기술 봉쇄 전략 강화… 한국 산업 위협 직면

세계 경제 구조적 변화 속 미국 중심 기술 봉쇄 전략 확산 차세대 배터리 핵심 초크포인트 장악하며 한국 산업 위협 가중 합성생물학 등 혁신 기술로 한국만의 탈출구 마련 필요성 커져

2025-09-09     이형래 기자
세계 경제 구조적 변화 속 미국 중심의 기술 봉쇄 전략으로 차세대 배터리 핵심 초크포인트를 장악하며 한국 산업에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다.

[CEODAILY=이형래 기자] 세계 경제 질서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과거 수십 년간 주도해 온 세계화의 기존 규칙이 붕괴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 규칙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변화나 일시적 갈등이 아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임을 의미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5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에 따르면, 최고위험관리자의 52%가 단기적으로 "불안정한" 미래를 예상하고 있으며, 31%는 더 큰 혼란, 5%는 전 지구적 재앙 수준의 위험을 내다보고 있다. 이는 냉전 이후 가장 분열된 시기를 방증하며 세계 경제 성장 둔화와 함께 전 지구적 압박 요인으로 작용한다. 세계은행은 2025년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3%로 낮췄으며, 무역 장벽 증가와 정책 불확실성 심화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무역 정책과 글로벌 불확실성은 긴장의 중심에 있다. 과거의 관세 중심 무역 전쟁에서 벗어나, 경쟁은 특정 기술의 지배권 확보를 목표로 하는 '기술 봉쇄' 전략으로 진화했다. 이는 국가 간 상호의존성을 무기로 활용하는 전략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기술이나 부품, 자원 같은 '초크포인트(Chokepoint)'를 장악하는 데 주력한다. 초크포인트는 특정 산업과 군사 역량에 필수적인 요소로, 이를 통제하는 국가는 경쟁국의 발전을 저지하며 국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

배터리 초크포인트

 

미국은 이러한 기술 봉쇄 전략을 '좁은 마당, 높은 울타리(small-yard, high-fence)' 원칙 아래 추진 중이다. 미국 국가안보 당국자들은 단순한 기술 우위 확보가 아니라, 경쟁국의 기술 발전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전략은 넓은 분야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제한된 핵심 기술 영역에 대해 절대적 통제를 실행한다. 이는 특정 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단순한 경쟁을 넘어 공성전으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낸다.

해당 전략은 공식적으로는 중국을 겨냥하지만,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게도 중대한 딜레마를 제기한다.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미국의 안보 동맹이면서도 경제 경쟁자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특정 기술을 완전히 통제하려 할 경우, 그 울타리는 중국 차단뿐 아니라 동맹국의 기술적 종속을 동시에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의 한 부분이자 한국 경제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다.

미국 지정경제 원칙 하에서 차세대 배터리 산업은 핵심 전장이 되고 있다. 전기차와 에너지 저장 시스템의 핵심인 배터리는 미래 산업 패권에 결정적인 기술로, 미국은 원자재부터 제조, 응용과 재활용에 이르는 배터리 가치 사슬 전 단계의 핵심 기술 통제를 추구한다.

상류 단계에서는 직접 리튬 추출(Direct Lithium Extraction, DLE) 기술이 초크포인트 역할을 한다. 기존 리튬 생산 방식은 환경 부담이 컸으나, DLE는 염수에서 리튬 이온을 선택적으로 추출해 회수율을 95% 이상으로 높이고 생산 기간을 수개월에서 수 시간으로 단축하며, 물 사용과 환경 영향을 크게 줄이는 혁신 기술이다. 이 기술은 지질학적 조건에 의존하던 공급망을 기술력 중심으로 전환시키며, 미국의 거대산업 자본이 집중 투자하고 있다. 석유 기업과 유압 파쇄 기술 업체 등이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DLE 시장에 진입하고 있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기술과 자본 양면에서 경쟁 압박에 직면했다.

하류 단계에서는 전고체 배터리(Solid-State Battery, SSB)가 핵심 초크포인트다. 전고체 배터리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의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해 안전성과 에너지 밀도를 높이며, 전기차 주행 거리와 충전 시간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기술이다. 전고체 배터리를 선점하는 국가는 차세대 모빌리티와 에너지 산업의 표준을 주도할 수 있으며 기존 기술을 빠르게 대체할 수 있다.

미국은 DLE와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동시에 겨냥하는 협공 전략을 구사한다. 상류에서는 원자재 공급을, 하류에서는 최종 제품 표준을 장악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제조 강점을 갖고 있음에도 원자재 확보와 핵심 기술 라이선스 측면에서 심각한 압박을 받는다.

이 전략은 구체적 기업들의 움직임에서도 드러난다. 상류 DLE 분야에서는 인터내셔널 배터리 메탈스(IBAT)가 높은 리튬 회수율과 빠른 상업 생산을 강점으로, 엑손모빌과 테트라 테크놀로지스는 대규모 생산 시설을 건설하며 미국 내 리튬 산업 기반을 확보했다. 엑손모빌은 SK온과 대규모 리튬 공급 계약을 체결해 시장 지배를 노린다. 라일락 솔루션즈와 에너지엑스는 이온 교환과 용매 추출, 멤브레인 기술에서 혁신을 주도한다.

하류 전고체 배터리 분야에서는 퀀텀스케이프(QuantumScape)가 폭스바겐과 빌 게이츠 지원 아래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솔리드 파워(Solid Power)는 포드와 BMW 투자를 받아 2026년 상용화를 계획하고 있다. 양사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 라인 통합 기술을 개발하며 빠른 시장 진입을 준비한다.

미국은 이들 기업을 중심으로 강력한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주요 고객으로 확보한 완성차 업체들이 동시에 미국 스타트업의 핵심 투자자이자 전략 파트너 역할을 하면서, 한국 기업 매출 일부가 미래 기술 개발 자금으로 흘러가는 역설적인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한국 배터리 산업의 전략적 취약점을 내포한다.

또한 미국의 기술 초크포인트 전략은 일본과 공조하며 동맹 전선을 구축 중이다. 특히 일본의 토요타는 전고체 배터리 분야에서 압도적인 특허 장벽을 쌓고 있다. 최근 3년간 8,274건에 이르는 전고체 배터리 관련 특허를 등록했고, 기존 축적 특허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상당하다. 이는 경쟁사가 토요타 특허를 피하지 않고는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상용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특허 요새(Patent Fortress)'를 구축한 상태다. 토요타는 후발 주자들을 불리한 라이선스 계약이나 비용 부담이 큰 특허 소송으로 견제하는 전략을 수행한다.

토요타는 일본 석유화학 기업 이데미츠 코산과 협력해 핵심 소재인 황화물계 고체 전해질을 대량 생산할 공장을 2027년 완공할 계획이며, 연간 약 5만 대 전기차 배터리 공급을 목표로 전고체 배터리 양산 체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의 파괴적 혁신과 일본 대기업의 체계적 양산 준비가 결합해 강력한 미일 기술 동맹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동맹은 한국 배터리 산업에 기술적 고립과 압박을 동시에 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의 대표 배터리 3사인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은 글로벌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을 이끌고 있으나, 차세대 전고체 배터리 기술에서는 경쟁사 대비 시간 격차로 취약성이 드러나고 있다. 삼성SDI가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가장 적극적이고, LG에너지솔루션은 2030년 이전 상용화를 목표로 파일럿 라인 구축과 리튬-황 배터리 병행 개발을 진행 중이다. SK온은 2027년과 2029년 상용화를 노리는 투트랙 전략을 추진하며 포드와 기술 동맹을 강화한다.

하지만 미국 퀀텀스케이프와 솔리드 파워는 2025~2026년 상용화를 계획 중이고 일본 토요타도 2027~2028년 양산을 목표로 해, 한국 기업은 앞선 경쟁자의 기술 표준 선점과 초기 공급 계약 확보에서 차질이 예상된다.

이로 인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전고체 배터리 생산 자체보다 외국 기업 기술에 의존하는 하청 역할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로열티 비용은 수익성과 전략적 자율성에 타격을 주고, 한국이 고도로 숙련된 제조업체 역할에 머무르며 배터리 산업에서 핵심 혁신 가치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오랜 기간 유지된 한국 산업의 '초격차' 전략이 무력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술 경쟁 무대가 한국 강점인 제조 현장에서 미국의 특허와 연구 중심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한국은 경쟁력 유지와 기술 주권 확보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한편 차세대 배터리 기술 경쟁은 양자 컴퓨팅, 인공지능(AI), 합성생물학 등 신기술의 출현에 의해 더욱 복합화되고 있다. 양자 컴퓨팅은 배터리 소재 개발과 화학 시뮬레이션에 혁신을 가져와 기술 격차를 확대할 수 있으며, 현재 미국 기업들이 이 분야에 막대한 투자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인공지능은 소재 데이터 분석, 배터리 관리 시스템 최적화, 양산 공정 제어 등 배터리 산업 전반에 적용되며 미국의 AI 선도와 결합할 경우 미일 기술 동맹의 경쟁 우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합성생물학은 미생물을 공학적으로 설계해 리튬 등 핵심 광물을 저품위 광석이나 산업 폐기물에서 추출하는 '바이오 채굴'과 지속가능한 바이오 기반 배터리 부품 개발 등 차별화된 기술 경로를 제시한다. 이는 기존의 화학·무기물 기술 중심 초크포인트를 우회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한국이 기술 주권과 공급망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 전략 수단이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과거 성공 공식에 머무르지 않고 신기술과 전략적 혁신을 모색해야 하는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기술 초크포인트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질문과 대책 마련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