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남의 폴리코노미 3] 디지털자산 시장...은행권 진출과 제도화의 임계점
투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제도권 금융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폭발적 성장, 숫자로 보는 디지털자산 시장의 현주소 은행권 진출, 신뢰의 새로운 축을 세우다 혁신적 금융상품의 등장,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열쇠 리스크 관리, 새로운 차원의 도전 제도적 기반 구축, 시급한 현안 글로벌 동향과 국내 현실의 괴리 균형잡힌 규제 체계, 혁신과 안정성의 조화 패러다임 전환의 임계점에서
[CEONEWS=박수남 기자] 한국의 디지털자산 시장이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시장은 그동안 누적된 제도적 공백을 메우려는 움직임과 함께 전례 없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는 시중은행들의 적극적인 가상자산 사업 진출 의지다. 이는 단순한 새로운 수익원 발굴을 넘어, 금융업계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폭발적 성장, 숫자로 보는 디지털자산 시장의 현주소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의 급성장세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2024년 전체 시가총액이 전년 대비 약 96% 증가하며 3조 달러 선을 넘어섰고, 특히 1분기와 4분기의 가파른 상승이 주목받았다. 1분기에는 60% 가까운 상승률을 기록해 시장 전반의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4분기에도 약 40%의 추가 성장을 보여주면서 투자 심리가 크게 개선됐다.
국내 시장 역시 이러한 글로벌 트렌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국내 스테이블코인 거래 57조원, 테더가 거래액의 83%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분기당 57조원 규모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국내 증권시장 일평균 거래대금이 약 10조원 수준임을 감안할 때, 가상자산 시장의 유동성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시장의 성숙도다. 지난 8년 3개월 동안 전 세계 가상자산거래소에 8,950개의 가상자산이 신규 등록되었고 이중 약 40%가 등록 폐지되었다. 등록 폐지 가상자산의 90.5%가 3년을 넘기지 못하였다는 데이터는 시장이 자연스러운 도태 과정을 거치며 건전성을 확보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행권 진출, 신뢰의 새로운 축을 세우다
은행권의 가상자산 시장 진출이 가져올 변화는 단순히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 그 이상이다. 수십 년간 축적된 금융 인프라와 규제 준수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동안 투자자 보호에 한계를 보였던 가상자산 시장에 새로운 차원의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4개의 거래소(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가 과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권의 진출은 자연스럽게 경쟁 체제를 도입하며, 서비스 품질 향상과 수수료 인하 등 소비자 편익 증대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은행의 자금세탁방지(AML) 시스템과 내부통제 체계다. 기존 거래소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컴플라이언스 영역에서 은행권이 보유한 경험과 시스템은 시장 전체의 신뢰도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핵심 요소다. 이는 결국 기관투자자들의 본격적인 시장 참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혁신적 금융상품의 등장,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열쇠
제도권 편입이 가져올 또 다른 기대효과는 혁신적인 금융상품의 출시다. 미국에서는 2024년 1월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이후 폭발적인 자금 유입이 이어지고 있으며, 홍콩과 일본 역시 관련 상품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필요한 법적 토대만 마련되면 이러한 상품들을 출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특히 57조원 규모의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보여주듯, 국내에는 이미 충분한 유동성이 형성되어 있다. 이 거대한 유동성이 제도권 금융과 연결된다면, 금융업계에 새로운 성장 엔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금융회사의 주요 고객층인 고액자산가 및 기관투자자의 가상자산 투자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금융기관들도 이러한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다.
리스크 관리, 새로운 차원의 도전
하지만 은행권의 가상자산 진출이 장밋빛 미래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가상자산 특유의 극심한 가격 변동성이다. 하루에도 수십 퍼센트씩 등락을 거듭하는 가상자산의 특성상, 은행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리스크 관리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전통적인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 모델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산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가상자산은 24시간 365일 거래되며, 글로벌 시장의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가격이 변동된다. 이는 기존의 리스크 관리 체계로는 충분히 대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도전이다.
사이버 보안 위협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그동안 경험했던 해킹 사고들을 보면, 디지털자산의 특성상 한 번의 보안 사고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만약 은행이 운영하는 가상자산 서비스에서 대규모 해킹이나 자산 손실 사고가 발생한다면, 해당 은행은 물론 금융시스템 전반의 신뢰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제도적 기반 구축, 시급한 현안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적 기반의 부재다. 현재 국내 법체계에서 암호화폐는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암호화폐 연계 ETF 출시조차 막혀 있는 상황이다. 과세 체계 등 제반 인프라도 미비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원화 스테이블 코인 발행 허용과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대표발의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움직임이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화폐 대체재로서의 특성상 규제 공백이 발생할 경우 자본 유출 통로로 악용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중앙은행과 금융당국 간 역할 분담을 법률로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이 분야를 제도권 밖에 방치할 수는 없다.
글로벌 동향과 국내 현실의 괴리
2021년 가상자산 시가총액은 약 3조달러를 기록하면서 글로벌 사모펀드 시장에 육박하는 수준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경우 현재 가상자산 관련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있어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해외 주요국들의 움직임은 더욱 적극적이다. 미국은 이미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현물 ETF를 승인했으며, 홍콩은 아시아 최초로 관련 상품을 출시했다. 일본 역시 관련 법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유럽연합도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정을 통해 포괄적인 가상자산 규제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글로벌 동향에 비해 국내는 여전히 부분적이고 소극적인 접근에 머물러 있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이용자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산업 육성이나 혁신적 금융상품 개발을 위한 제도적 토대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균형잡힌 규제 체계, 혁신과 안정성의 조화
디지털자산 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혁신과 안정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과도한 규제는 혁신을 저해하고 시장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지만, 규제 부재는 투자자 보호에 공백을 만들고 시장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포괄적이면서도 유연한 기본법이다. 이 법은 가상자산의 법적 정의를 명확히 하고, 발행부터 공시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완결성 있는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또한 증권형 토큰(ST) 등 기존 자본시장과 겹치는 영역에서의 규율 범위도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는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 이해상충 방지 등 금융소비자보호법상 보호장치를 가상자산 거래에도 적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동시에 혁신적인 금융서비스 개발을 위한 규제 샌드박스 확대 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의 임계점에서
한국의 디지털자산 시장은 현재 패러다임 전환의 임계점에 서 있다. 은행권의 진출과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투기 자산'이라는 오명에 시달렸던 가상자산이 제도권 금융의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회의 선제적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7조원 규모의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보여주듯, 시장은 이미 충분한 규모와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시장의 역동성을 안전하고 투명한 제도적 틀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법적 토대다.
디지털자산이라는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에서 한국 금융권이 신뢰받는 혁신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면, 규제와 육성, 혁신과 안정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단순히 한 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금융업계 전체의 글로벌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변수가 될 것이다.
시장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이제 제도가 이를 뒷받침할 차례다. 혁신과 안정성이 조화를 이루는 디지털자산 생태계 구축이야말로, 한국 금융업계가 맞이할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