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남의 폴리코노미 10] 보이지 않는 전쟁 "차세대 배터리 기술 초크포인트와 한국 경제의 딜레마"
관세에서 초크포인트로의 전환 "좁은 마당, 높은 울타리" 전략 21세기 초크포인트...리튬 배터리 가치 사슬 상류...직접 리튬 추출(DLE) 기술 하류...전고체 배터리(SSB) 미국의 야망...차세대 배터리 기술 패권 장악 미국의 핵심 기업...DLE와 SSB 부문 미국의 차세대 배터리 기술 생태계 동맹 전선... 일본의 전고체 배터리 특허 요새 기로에 선 한국...기술적 포위에 대처 미래 그리고 리스크
[CEONEWS=박수남 기자] 세계 경제 질서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화를 이끌었던 기존의 규칙들은 와해되어 가고 있으며, 새로운 규칙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나 일시적 갈등이 아닌,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5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에 따르면, 최고위험관리자(CRO)의 52%가 단기적으로 "불안정한" 미래를 예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31%는 더 큰 혼란을, 5%는 전 지구적 재앙 수준의 리스크를 예측하는 등 비관론이 팽배해지고 있다. 이는 냉전 이후 가장 분열된 시기라는 평가를 뒷받침하며, 경제 성장의 둔화와 맞물려 전 세계를 압박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2025년 세계 경제 성장률을 기존 전망치보다 대폭 하향 조정한 2.3%로 예상하며, 무역 장벽의 증가와 정책 불확실성 심화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관세에서 초크포인트로의 전환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과거의 무역 전쟁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관세는 여전히 유효한 정책 수단이지만, 전략의 핵심은 보다 정교하고 치명적인 방향으로 진화했다. 최고 경제학자들의 97%가 무역 정책을 글로벌 불확실성의 가장 큰 원천으로 꼽을 만큼 , 무역을 둘러싼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이제 경쟁의 패러다임은 광범위한 시장 점유율 다툼에서 특정 기술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기술 봉쇄'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국가 간 상호의존성을 무기화하는 전략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가장 취약한 고리, 즉 '초크포인트(Chokepoint)'를 장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초크포인트란 특정 산업이나 군사 역량의 작동에 필수적인 핵심 기술, 부품, 자원을 의미하며, 이를 통제하는 국가는 경쟁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국제적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좁은 마당, 높은 울타리" 전략
이러한 기술 봉쇄 전략의 중심에는 미국의 새로운 지정경제 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 당국자들이 명시적으로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의 목표는 더 이상 경쟁국에 대해 "상대적" 우위나 "일정한 격차"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목표는 경쟁자의 기술 발전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고 결정적인 기술적 봉쇄를 가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이른바 "좁은 마당, 높은 울타리(small-yard, high-fence)" 전략은 이러한 기조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전략은 광범위한 경제적 압박 대신,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좁은 영역의 기술"을 선별하여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높은 울타리"를 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전략의 등장은 세계 경제가 단순한 경쟁의 시대를 지나, 특정 기술을 둘러싼 공성전(siege)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는 더 빨리 달리는 것을 넘어, 경쟁자의 다리를 부러뜨려 경주 자체를 끝내려는 시도와 같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은 전 세계적인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는 현 상황에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 전략은 공개적으로는 중국을 겨냥하고 있지만, 그 논리는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게도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준다. "좁은 마당"에 속하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미국의 안보 동맹인 동시에 치열한 경제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특정 기술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추구할 때, 그 "높은 울타리"는 중국을 차단하는 동시에, 동맹국들을 기술적 종속 상태로 묶어두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 담론에 가려져 한국 언론이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그러나 한국 경제의 미래에 결정적일 수 있는 숨겨진 위협이다.
21세기 초크포인트...리튬 배터리 가치 사슬
미국의 새로운 지정경제 원칙이 적용되는 핵심 전장은 바로 차세대 배터리 산업이다. 전기차와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의 심장인 배터리는 미래 산업의 패권을 좌우할 핵심 기술이며, 미국은 이 가치 사슬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악하려는 정교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 전략은 배터리 공급망을 상류(원자재), 중류(제조), 하류(응용 및 재활용)로 나누어 각 단계의 핵심 기술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상류...직접 리튬 추출(DLE) 기술
첫 번째 핵심 초크포인트는 리튬 생산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직접 리튬 추출(Direct Lithium Extraction, DLE) 기술이다. 전통적인 리튬 생산 방식은 염호(brine lake)의 물을 거대한 증발 연못에 가두고 수개월에 걸쳐 자연 증발시켜 리튬을 농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하고, 막대한 양의 물을 소비하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반면, DLE 기술은 흡착, 이온 교환, 멤브레인 분리 등 첨단 기술을 이용해 염수에서 리튬 이온만을 선택적으로 직접 추출한다. 이 기술은 리튬 회수율을 극대화하고(최대 95% 이상), 생산 기간을 수개월에서 수 시간으로 단축하며, 물 소비와 환경 발자국을 최소화하는 혁신적인 방식이다.
DLE의 전략적 중요성은 단순히 효율성 개선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경쟁 우위의 원천을 지질학적 조건(염호 보유 여부)에서 기술력(추출 공정 IP)으로 전환시킨다. 즉, 막대한 리튬 매장량이 없는 국가라도 DLE 기술만 확보하면 글로벌 리튬 공급망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의 거대 자본과 기술력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현상은 '거대 탄소 자본의 대전환(The Great Carbon Pivot)'이다. 엑손모빌(ExxonMobil)과 같은 미국의 석유 공룡들과 유압 파쇄(fracking) 기술 기업 ITAMCO 등이 막대한 자본력, 지질학적 데이터, 대규모 플랜트 운영 노하우를 앞세워 DLE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상대해야 할 경쟁자가 민첩한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워싱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산업 자본임을 의미하며, 경쟁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변수다.
하류...전고체 배터리(SSB)
두 번째 핵심 초크포인트는 배터리 기술의 '성배(Holy Grail)'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Solid-State Battery, SSB)다. 현재의 리튬이온 배터리는 인화성 액체 전해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화재 및 폭발 위험이 상존하며, 에너지 밀도 향상에도 한계가 있다.
전고체 배터리는 이 액체 전해질을 고체 전해질로 대체하여 구조적으로 안전성을 확보하고, 에너지 밀도를 획기적으로 높여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늘리고 충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 기술이다.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선점하는 국가는 단순히 시장을 선도하는 것을 넘어, 차세대 모빌리티와 에너지 산업의 표준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을 순식간에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고, 산업계의 위계를 재편할 수 있는 파괴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전략은 바로 이 두 지점을 동시에 겨냥하는 '협공(Pincer Movement)' 전략이다. 상류에서는 DLE 기술로 핵심 원자재의 공급을 통제하고, 하류에서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로 최종 제품의 표준을 장악하려 한다. 이 협공 전략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의 배터리 기업들은, 비록 세계 최고 수준의 중류(제조)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원자재 확보와 핵심 기술 라이선스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결국 기술 종속의 덫에 걸릴 위험에 처해 있다.
미국의 야망...차세대 배터리 기술 패권 장악
미국이 차세대 배터리 기술의 초크포인트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구체적인 데이터로 확인되는 냉엄한 현실이다. 최근 발표된 한 학술 연구는 글로벌 리튬 공급망의 기술 지형을 분석하며, 미국의 압도적인 기술 패권을 수치로 증명했다. 이 데이터는 한국 경제의 핵심 동력인 배터리 산업이 직면한 위협의 실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표가 보여주는 '가치 사슬 고도화에 따른 지배력 강화' 현상은 미국의 전략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방증한다. 이는 단순히 여러 기술 분야에서 우연히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가치가 창출되는 핵심적인 고부가가치 영역을 의도적으로 장악하려는 전략적 선택의 결과다. 이는 "첨단 기술로 나아갈수록 미국의 기술적 영토 안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국의 핵심 기업...DLE와 SSB 부문
이러한 기술 패권은 구체적인 기업들의 약진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들은 강력한 기술력과 거대 자본의 지원을 바탕으로 차세대 배터리 시장의 규칙을 새로 쓰고 있다.
상류(DLE) 초크포인트 주도 기업
인터내셔널 배터리 메탈스 (IBAT): 최대 95%의 리튬 회수율을 자랑하는 특허받은 모듈형 DLE 플랜트를 통해, 12~18개월 내에 상업 생산이 가능한 신속성을 무기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엑손모빌 (ExxonMobil) 및 테트라 테크놀로지스 (TETRA Technologies): 아칸소 주에 대규모 리튬 생산 시설을 건설하며 미국의 새로운 '리튬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엑손모빌은 SK온과 최대 10만 톤 규모의 리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시장 지배자로 나서고 있다.
라일락 솔루션즈 (Lilac Solutions) 및 에너지엑스 (EnergyX): 각각 이온 교환 및 용매 추출/멤브레인 분야에서 혁신적인 DLE 기술을 개발하며 기술 생태계를 다각화하고 있다.
하류(SSB) 초크포인트 주도 기업
퀀텀스케이프 (QuantumScape, QS): 폭스바겐과 빌 게이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전고체 배터리 분야의 선두 주자.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리튬-메탈 방식의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솔리드 파워 (Solid Power, SLDP): 포드와 BMW의 투자를 유치했으며, 2026년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 이미 2022년 중반에 주요 파트너사에 테스트용 배터리 셀을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 라인에 통합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여 빠른 양산 체제 전환을 노리고 있다.
통제 생태계의 완성
미국의 전략은 개별 기업의 성장을 넘어,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창출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의 차세대 배터리 기술 생태계
이 생태계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 '고객이 경쟁자의 자금줄이 되는' 위험한 역설을 만들어낸다. 폭스바겐, 포드, BMW 등은 현재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의 핵심 고객사다. 그러나 이들 고객사가 바로 한국 기업의 미래를 위협할 기술(전고체 배터리)을 개발하는 미국 스타트업(퀀텀스케이프, 솔리드 파워)의 최대 투자자이자 전략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즉, 오늘 한국 기업이 벌어들인 매출이 내일 한국 기업을 대체할 기술의 R&D 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배터리 산업이 처한 매우 위태로운 전략적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다.
동맹 전선... 일본의 전고체 배터리 특허 요새
미국의 기술 초크포인트 전략은 단독 행동이 아니다. 이는 핵심 동맹국과의 공조를 통해 더욱 강력하고 배타적인 기술 블록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일본, 특히 자동차 거인 토요타(Toyota)가 있다. 이는 한국 배터리 산업이 단일 국가가 아닌, 거대한 '동맹 전선'에 맞서야 하는 고립된 상황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토요타의 특허 장벽
전고체 배터리 분야에서 토요타의 지배력은 압도적인 특허 포트폴리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GlobalData의 분석에 따르면, 토요타는 최근 3년간(2020년 10월~2023년 10월) 무려 8,274건의 전고체 배터리 관련 특허를 취득했다. 이는 2위인 LG(5,539건)를 크게 앞서는 수치이며, 과거부터 꾸준히 축적해 온 1,300여 건의 특허 를 포함하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단순한 R&D의 결과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구축된 '특허 요새(Patent Fortress)'다. 토요타의 전략은 경쟁사들이 자사의 방대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침해하지 않고는 독자적인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것 자체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는 후발 주자들을 불리한 라이선스 계약으로 유도하거나,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특허 소송에 휘말리게 하여 R&D 역량을 고갈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토요타는 기술적 우위뿐만 아니라, 시장 경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법률적 무기'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실에서 공장으로... 이데미츠와의 동맹
토요타의 전략은 서류상의 특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일본의 석유화학 대기업 이데미츠 코산(Idemitsu Kosan)과의 동맹은 이들의 야망이 상용화를 향해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요타는 이데미츠와 협력하여 전고체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황화물계 고체 전해질을 대량 생산할 계획이며, 이를 위한 대규모 공장이 2027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이 공장은 연간 약 5만 대의 전기차에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이는 토요타가 2027-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전고체 배터리 양산 체제를 착실히 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일 기술 동맹의 형성
미국 스타트업들의 파괴적 혁신과 일본 산업 거인들의 체계적인 양산 준비는 차세대 배터리 분야에서 강력한 '미일 기술 동맹'이 형성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이 DLE와 전고체 배터리 원천 기술로 미래 시장의 설계도를 그린다면, 일본은 압도적인 특허와 소재 양산 능력으로 그 설계도를 현실화하고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는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이러한 동맹 전선의 구축은 한국에게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다. 안보의 핵심 동맹인 미국과, 가장 가까운 경제 경쟁자이자 파트너인 일본이 한국의 핵심 미래 산업을 양쪽에서 압박하며 기술적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더 이상 개별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라, 한국이 거대한 기술 블록에 맞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지정경제적 싸움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기로에 선 한국...기술적 포위에 대처
글로벌 차원에서 진행되는 기술 초크포인트 전략의 최종 목표 지점은 명확하다. 바로 한국 경제의 핵심 기둥 중 하나인 배터리 산업이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으로 대표되는 'K-배터리' 3사는 현재 글로벌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차세대 기술인 전고체 배터리 경쟁에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도전의 핵심은 '기술적 종속'의 위험이다.
K-배터리 3사의 현주소와 시간 격차
한국 배터리 3사 역시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으나, 경쟁국들과의 미묘한 '시간 격차'가 전략적 취약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삼성SDI: 3사 중 가장 공격적으로 2027년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수원 연구소에 파일럿 라인인 'S-라인'을 가동 중이며, 고객사들에게 샘플을 제공하며 성능 검증 단계에 진입했다.
LG에너지솔루션: 2030년 이전 상용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역시 황화물계에 집중하고 있으며, 2025년 초 파일럿 라인 건설에 착수했다. 동시에 리튬-황 배터리 개발도 병행하며 기술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있다.
SK온: 고분자-산화물 복합계 전고체 배터리를 2027년, 황화물계 전고체 배터리를 2029년에 상용화하는 투트랙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핵심 파트너인 포드와의 기술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문제는 이 타임라인이 경쟁자들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퀀텀스케이프와 솔리드 파워는 2025-2026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 일본의 토요타는 거대 양산 파트너와 함께 2027-2028년을 목표로 하고 있다. K-배터리의 선두 주자인 삼성SDI가 2027년을 목표로 하지만, 미국 선두 기업들보다 1~2년 늦다. 이 시간 격차는 짧아 보이지만, 기술 표준과 초기 시장을 선점하는 데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들은 주요 완성차 업체들과의 초기 공급 계약을 독점하고, 기술 표준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설정함으로써 후발 주자들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기술적 종속의 위험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전고체 배터리를 생산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아니라, 전고체 배터리를 생산하되 외국 기업의 기술 라이선스에 의존하는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양산 효율성과 품질 관리 능력을 유지하더라도, 핵심적인 DLE 및 전고체 배터리 원천 기술(IP)에 대한 로열티를 미국과 일본 기업에 지불해야 한다면 수익성과 전략적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이는 곧 한국 배터리 산업이 '배터리 업계의 폭스콘(Foxconn)'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타사의 핵심 혁신 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고도로 숙련된 제조업체로 남지만, 가치 사슬의 극히 일부 수익만을 가져가는 역할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한국 산업계가 오랫동안 성공 공식으로 여겨온 '초격차(超格差)'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국의 제조 역량을 따라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DLE와 전고체 배터리라는 새로운 기술로 산업의 기반 자체를 바꾸어 기존의 초격차를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경쟁의 장이 한국의 강점인 '공장'에서, 미국의 새로운 강점인 '연구실과 특허청'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 표는 경쟁 구도를 한눈에 보여주며, 한국 기업들이 직면한 시간 격차와 경쟁사들의 강력한 동맹 관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한국 배터리 산업이 현재의 성공에 안주할 경우, 미래 기술 경쟁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기술 종속의 길을 걷게 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다.
미래 그리고 리스크
차세대 배터리를 둘러싼 기술 패권 경쟁은 고립된 현상이 아니다. 양자 컴퓨팅, 인공지능(AI), 합성생물학과 같은 파괴적 신기술의 등장은 기존의 초크포인트 위협을 더욱 증폭시키거나, 혹은 역으로 새로운 탈출구를 제공할 수 있는 복합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양자 컴퓨팅 (Quantum Computing)
양자 컴퓨터의 막대한 연산 능력은 기존 컴퓨터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던 신소재 개발 및 화학 시뮬레이션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이는 전고체 배터리의 성능을 좌우할 새로운 고체 전해질이나 음극재 물질을 발견하는 과정을 급진적으로 가속화할 수 있다.
양자 컴퓨팅 기술을 배터리 연구에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적용하는 국가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영구적인 기술 격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 미국 테크 기업들이 양자 컴퓨팅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기존의 기술 초크포인트를 더욱 공고히 하는 '위협 증폭기(Threat Multiplier)'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양자 컴퓨팅이 2035년까지 창출할 경제적 가치가 1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 소재 과학 분야에서의 파급력 또한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 (AI)
인공지능은 이미 다양한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으며 , 배터리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AI는 방대한 소재 데이터를 분석하여 새로운 물질의 특성을 예측하고,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을 최적화하며, 복잡한 양산 공정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AI 분야에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앞세운 미국의 리더십과 차세대 배터리 기술에서의 신흥 지배력이 결합될 경우, 강력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AI는 R&D 주기를 단축시켜 경쟁국과의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는 미일 기술 동맹의 패권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합성생물학 (Synthetic Biology)
이러한 복합적 위협 속에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은 한국이 기술적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잠재적인 '비대칭적 탈출구'를 제시한다. 합성생물학은 생명체를 공학적으로 설계하고 재구성하여 산업적으로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술이다.
배터리 가치 사슬에 합성생물학을 적용할 경우, 기존의 기술적 난제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바이오 채굴 (Bio-mining): 특정 미생물을 공학적으로 설계하여 저품위 광석이나 산업 폐기물에서 리튬과 같은 핵심 광물을 추출하도록 할 수 있다. 이는 지질학적 한계와 미국이 주도하는 DLE 기술 초크포인트를 모두 우회할 수 있는 혁신적인 대안이다.
바이오 소재 (Bio-materials): 미생물 발효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바이오 기반 배터리 부품(예: 바인더, 분리막, 심지어 전해질)을 개발할 수 있다. 이는 석유화학 기반의 현재 소재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기술 경로를 개척하여 독자적인 IP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기회를 제공한다.
미국의 전략이 화학적 추출, 무기물 기반 소재라는 '현재의 기술 패러다임' 내에서 초크포인트를 장악하는 것이라면, 궁극적인 대응 전략은 그 초크포인트의 통제권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초크포인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것이다.
합성생물학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더 나은 DLE 공장을 짓는 문제가 아니라, 효모(yeast)에게 리튬을 처리하는 법을 가르쳐 DLE 기술 자체를 구시대의 유물로 만드는 접근법이다. 미국 '깅코 바이오웍스(Ginkgo Bioworks)'와 같은 선도 기업들의 사례에서 보듯 , 이는 한국이 기술 주권을 확보하고 지속가능한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는 중요한 장기적 전략적 헤지(hedge)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초격차'를 외치는 동안, 세계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쓰고 있었다. 더 빨리 달리는 자가 이기는 경주가 아니라, 길목을 선점해 경주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공성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거대한 전환 앞에서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안주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패배의 길이다. 위기의 본질을 직시하고,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기술 주권이라는 낯설지만 절실한 과제 앞에서 우리 사회 전체가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 경제의 미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