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의 역사와 서경배의 길... 미(美)와 경쟁의 교차로에서

아름다움은 어떻게 전설이 되는가 한류와 설화수... 중국 시장에 핀 전성의 꽃 전략적 다변화와 혁신...브랜드, 디지털, ESG 서경배 회장... 균형과 결단의 서사

2025-05-12     전영선 기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CEONEWS=전영선 기자] 1945년, 폐허 위에 세운 작은 공장이 있었다.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 여정은, 전쟁과 산업화의 광풍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때로 무기였고, 위로였으며, 생존의 전략이기도 했다. 한방의 지혜와 과학의 논리를 결합해 ‘기술과 정성’이라는 언어로 한국인의 피부에 말을 건넨 기업, 아모레퍼시픽의 이야기다.

서성환 선대회장의 개척 정신을 이어받아, 서경배 회장은 기업의 DNA를 새롭게 리모델링했다. 설화수의 세계화로 K-뷰티를 글로벌 주류로 끌어올렸고, '뷰티는 문화다'라는 철학 아래 예술과 기업의 경계를 허물었다. 한·중 외교 갈등, 팬데믹,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센 파도를 지나며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기업을 단련시켰다. 위기의 순간마다 서 회장은 “혁신은 구조조정이 아닌 창조”라 말하며, 내일을 향해 더 멀리 닻을 올렸다.

이제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 회사’라는 이름을 넘어선다. 재생에너지와 자원순환을 위한 ESG 경영, AI 기반 뷰티 솔루션 개발, 세계시장을 겨냥한 포트폴리오 다각화. 그것은 단지 성장 전략이 아닌, '무엇을 위해 아름다움을 창조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80년의 여정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경영의 길, 리더의 선택, 기업의 사명은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아모레퍼시픽은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묵묵히 걸어온 한 남자, 서경배가 있다.
이 특집은 '미(美)와 경쟁의 교차로'에서 기업과 인간,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의 서사를 기록하려 한다.

아름다움은 어떻게 전설이 되는가

1945년 해방의 그믐달 아래, 폐허 위에 작은 기업이 태어났다. 이름은 태평양화학공업사. 그 씨앗은 포화된 영토에 美를 뿌리려는 열망이었다. 설립자 서성환 선대회장은 개성 출신의 상인이자 한방에 정통한 인물로, 전통과 과학을 혼합한 화장품 개발에 천착했다. “기술과 정성으로 아름다움과 건강을 창조”하겠다는 그의 신념은, 이후 아모레퍼시픽의 중심 이념이 되었다 6·25전쟁과 급격한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회사는 꿋꿋이 성장기를 걸었다. 1956년 법인 전환을 거쳐, 1993년 ‘태평양㈜’이 되기 전까지 그 이름 아래에서 각종 비누·화장품·청량음료까지 생산하며 내수시장을 다져나갔다

이름이 바뀌는 순간마다 새로운 날갯짓을 준비했다. 2006년, 60년 역사 속에서 사명은 ‘아모레퍼시픽’으로 탈바꿈했다 이때부터 AP(아모레퍼시픽)는 창업주의 “AMORE(사랑)와 PACIFIC(태평양)의 조화” 비전을 본격화했다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아름다움(AMORE)과 강력한 다이내믹(PACIFIC)이 한 몸에 어우러진다는 이름처럼, 회사는 전통 한방기술과 현대 과학기술을 결합한 제품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류와 설화수... 중국 시장에 핀 전성의 꽃

2000년대 초반, 한류 문화의 파고를 타고 아모레퍼시픽은 K-뷰티(韓流化粧品) 대표주자로 급부상했다. 특히 설화수 브랜드의 등장은 기폭제였다. 1997년 출시된 설화수는 한국의 전통 한방 원료(인삼)를 현대화한 고급 화장품으로 자리 잡았다. 설화수는 이후 궤적이 화려했다. 2015년, 국내 단일 브랜드로는 최초로 연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였다.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이 고급화 전략과 만나, 세계적 경쟁력을 가졌음을 입증한 순간이었다. 한편 남다른 마케팅으로 장미빛 미래를 맞았다. 설화수는 색상부터 제품 철학까지 한국적 요소를 강조하여, 중국 명동·가로수길의 백화점 매장에서는 “워 아이 셔화쇼(我愛雪花秀, 나는 설화수를 사랑한다)”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 AP의 실적은 눈부셨다. 2012년 약 2조9천억원이던 매출은 이듬해 3조원을 넘겼고, 매년 ‘어닝 서프라이즈’를 거듭했다. 럭셔리 브랜드인 설화수, 헤라 등을 필두로 내수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 등 해외 매출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6년 매출 5조6천억원, 영업이익 8천억원대의 사상 최대 실적은 한국 화장품의 전성기를 알렸다. 그해 주가는 300만원대로 치솟았고, 투자자들은 아모레퍼시픽을 “황제주”라 불렀다.

그러나 2017년부터 운명의 굽이길이 찾아왔다. 사드(THAAD) 배치로 시작된 한·중 갈등은 사실상 아모레퍼시픽의 중국 시장을 겨냥한 계시였다. 중국 정부의 불매 압박과 관광객 급감으로 매출이 뚝 떨어졌다. 2016년 기록적 실적을 달성한 직후, 2017년부터 실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명동의 화장품 거리는 고요해졌고, 화려했던 전성기는 돌이 되어 귓전에 울려 퍼졌다.

전략적 다변화와 혁신...브랜드, 디지털, ESG

위기 앞에서 서경배 회장은 과감히 닻을 올렸다. 그는 “지금이 구조조정 아닌 혁신을 실행해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첫째, 브랜드 포트폴리오 다변화다. 아모레퍼시픽은 설화수·헤라 같은 럭셔리 중심에서 벗어나 글로벌 소비자 저변을 넓히고자 한다. 김승환 대표(전무)는 “‘글로벌 포트폴리오 다변화와 디지털 전환에 힘쓸 것’”이라고 선언했다. 2020년대 들어 미국·유럽 시장에서 라네즈와 코스알엑스, 에스트라 같은 ‘미래 성장 브랜드’를 키우는 등, 전통 강자들 이외의 사업모델을 강화하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2022년 코스알엑스 지분을 추가 인수하여 자회사로 편입했고, 이 영향으로 미주 시장 매출은 전년 대비 79% 성장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체질을 바꿔 급변하는 시장에 적응하려는 움직임이다.

둘째, 디지털 전환(DX)이다. “AI와 데이터의 시대, 뷰티 산업도 예외가 아니다”라는 믿음 아래 대대적인 디지털 혁명을 추진했다. 최근 박종만 부사장(CDO)은 “디지털 마케팅과 e커머스 전환 추진 5년 만에 성과를 보고 있다”며 “국내 이커머스 채널 매출 비중이 40%로 가장 크고 플랫폼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즉, 온라인 중심 영업 체제를 구축하면서 매출 효율성을 높였다. 올해는 더 나아가 생성형 AI를 뷰티 솔루션에 적용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의 피부 상태와 상황을 고려해 맞춤형 추천을 제공하는 ‘AI 카운슬러’ 서비스 개발이 진행 중이다. 내부적으로도 화장품 연구, 콘텐츠 제작, 매장 기획 등 다양한 영역에 AI를 활용하면서 “조직 간 디지털 격차를 줄였다”고 박 부사장은 설명했다. 서경배 회장의 “미래를 대비하는 리더십”은 디지털 기반에서의 ‘턴어라운드’를 꾀하고 있다.

셋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다. 아모레퍼시픽은 2030년까지 ‘A MORE Beautiful Promise’라는 지속가능 목표를 내걸었다. 모든 신제품에 친환경·사회적 가치를 담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 100% 재활용 또는 생분해 가능한 포장으로 전환하며, 2025년까지 전 사업장에서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달성하겠다는 구체적 계획이다. 실제로 최근 발표에 따르면, 신규 제품의 91.8%는 이미 환경·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고 있고, 친환경 소재를 적용하여 포장재 사용을 줄인 비율도 매년 증가 추세다. 또 ‘사람을 아름답게,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성·포용성과 사회기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비즈니스가 이윤 추구를 넘어 사회적 책임을 묻는 시대, AP는 자원순환과 탄소중립 투자에 대규모 예산을 배분하며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서경배 회장... 균형과 결단의 서사

그렇다면 이 모든 선택의 중심에는 누구인가. 서경배 회장은 어떤 리더인가? 그는 은둔형 혁신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디어 앞에 자주 서지 않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고(故) 서성환 선대회장이 “먼저 시작해 먼저 성공하라”는 경영철학을 강조했던 것처럼, 서경배 회장도 도전의 리더십을 이어왔다. IMF 직전 태평양그룹의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지켜낸 일화는 유명하다. 창업주가 닦은 길을 자신만의 창의력으로 넓혀온 것이다. 또한 그는 21세기적 ‘컬처 리더’로서, 회삿돈의 일부를 문화예술에 투자해 온 경영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전 세계 유수의 미술품을 수집해 세계 200대 컬렉터에 선정되기도 했고,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을 통해 예술과 소비자 경험을 연결했다. 그는 “화장품은 문화를 만드는 상품”이라는 철학을 기업문화로 구현하며, 이윤만이 아닌 인류공헌에도 시선을 던졌다.

전망...고요한 질문에서 시작된 미래

80년의 궤적을 돌아보면, 아모레퍼시픽은 늘 환희와 위기가 공존했다. 이젠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선도 단순히 과거 실적이 아닌, 앞으로의 지속가능 성장에 향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ESG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서경배 회장의 경영은, 더 이상 국내 미용시장을 넘어서 세계 시장의 틀을 뒤흔들 절박한 과제와 연결된다. K-뷰티의 수호자로서 아시아 문화를 증명하고자 했던 그의 초심은, 이제 전 지구적 문화 이슈와 맞물려 있다. 4차 산업혁명과 저성장 기조가 겹친 복합 위기 상황에서, 그의 리더십은 단순한 화장품 공급자가 아닌 ‘글로벌 뷰티 컴퍼니’로 거듭나야 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