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한국 CEO들의 대권 도전 역사

용감한 도전 뒤에 후유증도 만만찮아 경제 전문가 원하면서 ‘돈 정치’ 거부감도

2025-05-27     김병조 기자

[CEONEWS=김병조 기자]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3대 대통령 이승만을 시작으로 20대 윤석열 대통령까지 모두 1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중에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은 17대 이명박 대통령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도전한 사람은 많았다. 21대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한국 CEO들의 대권 도전기를 짚어본다.

이 되고자 했던 왕회장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정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순수한 기업인이 대권에 도전한 첫 사례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199218, 정주영은 돌연 정치에 참여하겠다며 정계 입문을 선언했다. 명분은 정치 자금의 폐해를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이명박의 자서전을 보면 평소 정주영 회장은 정치인들이 기업인들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정작 그 기업인들을 무시한다는 말을 했는데, 정계에 입문하면서 그동안 역대 정부에 바친 비자금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2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유명 코미디언인 이주일과 탤런트 최불암, 강부자를 비롯한 연예인을 영입하는 등 노력 끝에 창당 한 달 만에 14대 총선에서 3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총선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정주영은 1992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의 신념은 단순했다. "정치는 기업처럼 효율적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남북경협 확대 및 개성공단 조기 착공,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정책 전환, 관료주의 타파 및 규제개혁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특히 당시 고금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기업과 서민들을 생각해 악성 고금리를 낮추겠다거나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는 공약 등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현대그룹 임직원이 총동원되어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지만 16.3% 득표에 그친 결과는 냉정했다. 결국은 정치 거물 김영삼(당선), 김대중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 대권 도전은 현대그룹에도 불똥을 튀겼다. 정부와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고, 금융권의 협조도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그룹 내부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됐고, 후계자인 정몽헌 중심의 체제로 전환되며 현대의 권력 구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월드컵 바람타고 등장한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을 하고 있던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울산 동구에서만 내리 5선을 했고, 서울 동작구에서도 2선을 했다. 2002년 대선에 출마하기 전에 이미 4선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정몽준은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정몽준이 2002년 제16대 대선에 출마하게 된 배경은 20026월에 치러진 한일월드컵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정몽준은 한일월드컵을 유치했고, 게다가 한국 축구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자 그의 입지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에 정몽준은 연말에 있을 대선에 출마하기로 마음 먹고, 국민통합21을 창당했다. 처음에는 이회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근혜와 힘을 합쳐보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 후 후보단일화협의회의 압박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여론조사 방식에 의한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간발의 차이로 패하고 만다. 아버지 정주영에 이어 아들 정몽준도 대권 도전에 실패하고 만다.

후보 단일화 후 결과에 승복해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나섰으나 갑자기 선거 전날 밤 지지를 철회한다. 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 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컸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 선거에서 결국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했다. 하루만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꼴이 됐다.

유일하게 대통령이 된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

이명박은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한 사람이다.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입사해 12년 만에 사장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10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현대건설 회장에까지 올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감독했고,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건설 수주의 주역 역할을 했던 사람이 이명박이었다.

그랬던 이명박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14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와중에 현대를 나와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민자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출마하면서 정주영과 갈라서게 된다.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 노무현을 제치고 딩선되어 파란을 일으켰다. 그 후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당선돼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 등 굵직한 사업을 마무리하고 퇴임했다.

서울시장 퇴임한 이명박은 이듬해에 곧바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상황은 참여정부의 민생, 경제 파탄과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정권 심판론이 우세했고, 노무현 정부의 임기말 지지율 저하와 민주당 정권에 대한 피로감 등으로 인해 한나라당 소속 후보의 당선이 기정사실화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본선보다 한나라당 내 경선이 더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이로 인해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와의 치열한 진흙탕 싸움이 벌인 끝에 후보가 되어 정동영 후보를 무려 531만 표 차로 꺾고 여유롭게 당선됐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명박은 취임 직후 광우병 논란 등으로 대규모 촛불집회가 벌어져 위기를 맞기도 했다. 건설인 출신답게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했으나 반발이 심해 포기했고, 4대강 사업을 추진해 완공했다. 재임 중인 20103월에 천안함 피격 사건이 일어났고, 같은 해 11월에는 연평도 포격전이 터지는 등 안보상의 불안이 여전했다.

이명박은 대통령 임기는 무사히 마쳤지만 퇴임 후 2018년 다스 실소유주 논란과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등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징역 17년형의 선고를 통해 수감생활을 하다가 2022년 자신을 구속했던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사면·복권됐다.

젊은층의 지지를 받은 문국현

1995년부터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문국현은 2007 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030일 창조한국당을 창당하고 114일 당내 경선에서 단독 예비후보로 나선 뒤 대선후보로 추대됐고, 유효득표의 5.8%를 득표해 낙선했다.

하지만 주요 후보들의 소속 정당 및 이름을 가리고 공약으로만 평가하는 Blind Voting에서는 비록 인터넷 이벤트였을지언정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해 정책 경쟁력이 매우 강한 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던 점에서 훗날의 안철수가 막 정치권에 진입했을 때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안철수는 정치 진입 초창기 때 문국현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다.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이후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거래로 약 20억의 시세차익을 거둔 사실이 드러났고, 또한 2004년에 본인의 전원주택을 신축하면서 농지를 영농 목적으로 구입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용도변경허가를 신청한 것까지 알려지게 되어 도덕성에 의구심을 지니게 했다.

게다가 두 딸이 모두 비정규직이어서 약자의 아픔을 안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나, 막상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 내역에서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두 딸에게 약 6억원 가량의 현금과 주식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에 문국현의 선거운동본부에서는 "펀드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재산 분할관리를 했을 뿐"이라며 변명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걸 대선 출마 직후에야 본인의 명의로 황급히 환원시킨 사실이 밝혀져 본인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며칠 후에는 또 "아이들의 혼수를 생각해서 그랬다며 사실상 증여를 시인하는 등의 말바꾸기가 이어지며 상당한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개표 결과 5.83%라는 아쉬운 득표율로 대선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있었다면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는 15.9%라는 상당한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명박도 정동영도 불신하는 당시의 20대들에게 문국현이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보 단일화로 철수만 했던 안철수

의사, 교수, 기업인 출신 안철수는 대권에 3번 도전했다. 첫 도전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다. 야권 단일화를 위해 문재인 후보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던 중, 1123일 전격 사퇴하고 문재인 후보의 유세를 도왔다.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병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20161월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되고, 국민의당 또한 의석 38석을 획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1.4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3위로 낙선했다.

대선 낙선 후 당내 호남계 의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강행하여 바른미래당을 창당하였다. 7회 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득표율 19.55%을 기록하면서 김문수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에게조차 밀린 3위로 낙선했다.

20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02233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단일화했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면서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22422,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을 통해 최종적으로 국민의힘에 합류했다. 20226월 보궐선거에서 성남시 분당구 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로써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이후 5년 만에 원내에 복귀했다. 안철수는 현재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김문수 후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정치기업사이, 두 세계를 넘나든 한국 CEO

한국의 CEO들이 대권에 도전한 역사는 곧 경제와 정치의 접점에 대한 사회의 실험이었다. 산업화 시대의 상징인 정주영과 시스템 CEO로서 성공한 이명박, 그리고 그 틈을 잇는 정몽준의 사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업가정신의 정치적 변환을 보여 준다. 이들의 행보는 단지 정치적, 사회적 실험을 넘어 경제와 권력의 경계가 어떻게 맞닿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기도 했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경제를 좀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한국 정치사에서 기업인들의 대권 도전은 언제나 이목을 끌어왔다. 그러나 실제 도전한 5명 중에 성공한 사람은 1명에 불과하다.

이번 21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인 출신 후보가 없지만, 갈수록 경제전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또다시 CEO 출신 대통령 후보가 나올 여건은 충분해 보인다. 향후 대권 도전은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출마가 아닌, 정책 주도자 혹은 국민 참여형 플랫폼의 리더로서의 변형된 정치 CEO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