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기자 칼럼] SKT 유심 대란을 바라보는 시각

사과보다 시스템을 바꿔라

2025-05-14     이재훈 기자
이재훈 CEONEWS 대표기자

[CEONEWS=이재훈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결국 입을 열었다. 유심 보호서비스 자동가입 논란과 유심 교체 대란으로 촉발된 통신 대혼란 사태에 대해 “고객과 사회에 불편을 드려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지만, 이번엔 너무 늦었고, 너무 계산적이었다. 사과문 뒤에 감춰진 본질은 조직 스스로가 고객의 권한을 ‘기술적 편의’라는 이름으로 침해한 구조적 태만에 있다. SKT의 이 사태는 단순한 ‘유심 수급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에 의해 고객이 통제당한, ‘디지털 권력의 오용’이 만들어낸 신뢰 붕괴의 현장이다.

고객을 “관리 대상”으로 본 결과

SKT는 유심 보호라는 명분으로 고객의 동의 없이 자동 가입을 밀어붙였다. ‘보안’이라는 방패를 들고,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언어적 위장을 덧씌웠지만, 실상은 고객 동의 없는 시스템 일괄처리다. 이건 보호가 아니라 통제다. 기술은 사람을 돕기 위해 존재해야지, 사람을 무시하고 지배하기 위해 쓰여선 안 된다. 통신사 고객은 이제껏 요금제, 약정, 위약금이라는 세 겹의 울타리로 통제되어 왔는데, 이번엔 ‘알아서 가입해주는 보호 서비스’라는 네 번째 족쇄가 등장했다. 고객을 ‘소비자’가 아닌 ‘관리 대상’으로 본 기업 문화의 적나라한 반영이다.

‘비상경영 최고단계’라는 연극

SKT는 사태 수습을 위해 매일 데일리 브리핑을 연다고 한다. 을지로 삼화타워에서 김희섭 PR센터장과 류정환 네크워크인프라센터장, 임봉호 MNO사업부장이 브리핑을 진행하며, 수치와 대응 방안을 읊는다. 유심 교체 완료자 92만 명, 예약자 740만 명, 현장 투입 인력 1160명. 숫자는 많고 대응은 빠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관리 실패’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잊은 채, 마치 자연재해라도 난 듯 수습에만 집중하고 있다. 본질적 반성과 시스템 전환에 대한 논의는 없다. 이건 위기관리라기보다 언론 플레이에 가까운 포장이다.

데이터가 쌓이면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하면 대응도 할 수 있다. 그런데 SKT는 오히려 ‘예측 가능한 혼란’을 방치했고, 고객 불만이 임계점에 도달한 뒤에야 ‘비상경영 최고 단계’라는 극적인 선언을 꺼내 들었다. 보여주기식 컨트롤타워는 위기를 수습하지 못한다. 시스템을 바꾸는 의지가 없으면, 어떤 사과도 임시봉합에 불과하다.

‘알뜰폰 이용자도 포함’… 이것이 진짜 문제다

SKT는 사태 중간에 기존 SKT 고객뿐 아니라 알뜰폰 사용자들까지 유심 보호서비스 자동가입 대상으로 편입시켰다. 하루 만에 ‘검토 중’이던 정책이 실행됐다. 비공식 유통망을 통한 확산이라면 모르겠지만, 통신사 자체적으로 망을 빌려 쓰는 고객까지 자동가입한 건, 명백히 ‘통신 주권’을 무시한 행위다. 당신이 직접 선택한 통신사는 모빙, 스마텔, SK7 모바일인데, SKT 본사가 마음대로 가입시킨다? 이건 플랫폼 독점 권력의 횡포다.

알뜰폰 고객은 가성비를 선택한 ‘합리적 소비자’들이다. 이들을 자사 통신망을 이용한다는 이유로 ‘기술적으로 종속된 존재’로 간주하고, 동의 없이 시스템을 실행한 건, 통신시장의 근본 질서를 뒤흔드는 행위다. 이들의 이탈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소비자 이탈이 아니라 ‘통신 독립’을 향한 저항이 될 수도 있다.

사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최태원 회장의 사과는 어디까지나 ‘브랜드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온 SK그룹 회장다운 모습이었지만, 사과는 구조 개혁으로 이어져야 의미가 있다. 이번 사태는 시스템과 문화 전반을 다시 설계하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고객 신뢰를 돌리기 위해선 단순히 ‘많은 인력을 투입한다’거나 ‘데일리 브리핑을 한다’는 조치로는 부족하다. 기술을 고객에게 돌려줘야 한다. 선택권, 동의 절차, 투명한 정보 제공. 디지털 시대에 통신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이제 SKT가 보여줘야 할 건 ‘기술 기반 기업’의 책임 있는 진화다.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보안 서비스는 반드시 투명성과 동의의 원칙 위에 있어야 하며, 알뜰폰 고객과의 권한 관계 역시 재정립돼야 한다. 제로 베이스에서 통신 철학을 다시 설계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태는 SKT라는 브랜드를 단단히 흔들고 말 것이다.

유심 하나 바꾸는 데 이토록 혼란이 생긴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SKT가 고객과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사과는 했으니 이제 묻자. “고객이 선택하지 않은 기술, 당신은 다음엔 어떻게 막을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