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상법 개정안 파급효과 고찰
[CEONEWS=김소영 기자] 7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는 상법 개정안은 단순한 법률 개정이 아니다. 자산 2조 원 이상 대기업 약 200곳을 정조준한 ‘트리플 충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집중투표제 의무화, 자사주 소각 의무화. 이 세 가지 변화는 이사회 구성, 자본 운용, 지배구조의 핵심 축을 동시에 흔든다.
지난달 15일 시행된 1차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넓혔다. 이는 주주대표소송의 법적 근거를 강화해 경영진에게 ‘주주 이익’이라는 또 하나의 절대 기준을 부여한다. 여기에 ‘3%룰 강화’가 더해져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이 합산 3%로 제한되면서, 대주주 권한은 과거보다 확연히 축소됐다.
■ 집중투표제 의무화…이사회 판도 변화
8월 처리 목표인 2차 개정안은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다. 핵심은 집중투표제 의무화다. 현재 코스피 상장사 169곳 중 도입 기업이 고작 5.3%에 불과한 현실에서, 제도 의무화는 ‘이사회 다양성’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킬 전망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역시 주목된다. 현행 1명에서 2명 이상으로 늘어나면, 경영진과 감사위원 간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내부 견제 장치가 한층 단단해진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이사회 장악력’이 약화되는 대신, 주주 친화적 경영을 요구받는 구조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 자사주 소각 의무화…자본 전략에 제동
9월 논의 예정인 3차 개정안의 핵심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다. 취득한 자사주를 일정 기간 내 반드시 소각해야 하는 규정이 적용되면, 대기업들의 자본 유연성은 크게 줄어든다. 과거처럼 자사주를 전략적으로 보유하며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던 방식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는 외부 투자자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반면, 경영진에게는 민첩한 자본 운용이 어려워지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 기업들의 우려와 반발
삼성, SK, 현대차, LG 등 16개 주요 그룹은 이미 지난해 긴급 성명을 통해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정상적 이사회 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3%룰 강화가 결합되면, 해외 행동주의 펀드가 소수 지분만으로도 경영권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또한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장기 투자 전략을 제약하고, 경기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현금성 자산을 유연하게 운용할 여지를 제한할 수 있다.
■ 긍정적 파급효과…소액주주와 시장 투명성 강화
반대로 이번 개정안은 주주권익 신장과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소액주주가 이사회 진입 기회를 확보하고,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 준수 의무화로 주주 감시 기능이 강화된다. 국민연금 등 대형 기관투자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면, 기업의 이익조정과 불투명한 자본 운용이 억제되고, 주주환원 정책도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자주총 확대는 물리적 거리 제약 없이 주주 참여를 가능하게 해 ‘열린 기업문화’를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다.
■ 실적과 시장의 반응
재계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장 분석에서는 개정안이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글로벌 ESG 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지배구조 개편은 해외 투자자 신뢰를 높이고, 주가 프리미엄으로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집중투표제를 이미 도입한 일부 상장사는 외국인 지분율과 기업가치가 동반 상승한 사례가 있다. 다만, 개정안 전면 시행 시 대기업의 단기 실적 변동성은 불가피하다. 경영진이 방어적 의사결정을 지양하고 장기적 가치 창출에 초점을 맞추기까지는 일정한 ‘전환 비용’이 발생한다.
■ ‘권력 재편’의 시작
상법 개정안 3단계가 모두 시행되면, 한국 기업 환경은 ‘대주주 중심’에서 ‘다수 주주 균형 구조’로 이동한다. 대기업에겐 불편한 변화지만, 시장의 신뢰와 투명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국제 경쟁력 확보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전환이 기업 생태계 전반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고, 장기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 보완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규제 강화보다는 시장 특성을 고려한 유연한 적용, 기업과 주주의 상생 구조 설계가 필수적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상법 개정안은 ‘기업 권력’의 재편과 ‘주주 민주주의’의 확장을 동시에 촉발하는 역사적 분기점이다. 기업은 이제 ‘방어’가 아닌 ‘공유와 투명성’의 시대를 맞이해야 하며, 주주는 책임 있는 권한 행사로 시장 신뢰를 뒷받침해야 한다. 결국 이 변화가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동력이 될지, 아니면 불확실성을 키우는 리스크가 될지는, 우리 모두의 선택과 준비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