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X파일 6화]  'K-디펜스 제국의 설계자' 김승연

'7위 재벌'의 다음 10년을 해부하다

2025-09-11     이재훈 기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한국 재계는 '말 많은 회장'과 '말 적은 회장'으로 구분된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후자에 속한다. 그가 말을 아낄수록 시장은 더욱 세심하게 그의 행보를 주시한다. 올해 3월 31일, 그의 지분 절반을 세 아들에게 증여하는 결정을 발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경영권 승계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회장직을 유지했다. 이 한 줄의 뉴스 속에 한화의 과거·현재·미래가 압축돼 있다. 폭약에서 시작해 케미칼·금융·방산·항공우주·신재생에너지로 확장한 45년간의 여정. 그리고 이제 세 아들의 '삼각편대'로 전환하는 새로운 실험. 김승연의 방식은 늘 그랬다. 조용히 준비하되, 판을 크게 바꾼다.

■29세 집권, 운명을 바꾼 결단
195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김승연은 한국화약 창업주 김종희의 장남이다. 경기고를 거쳐 미국에서 경영학과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뒤, 1981년 부친 서거와 함께 29세의 나이에 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한국화약은 문자 그대로 '화약' 회사였다. 하지만 그는 이 뿌리에서 케미칼·금융·레저·에너지·방산으로 가지를 뻗는 거대한 나무로 키워냈다. 가족 구성은 단순명료하다. 부인과 세 아들. 장남 김동관(부회장), 차남 김동원(한화생명 사장), 삼남 김동선(부사장). 이들이 앞으로 한화를 '삼각편대'로 이끌 핵심 인물들이다. 혈연 중심의 지배구조는 여전히 한국 재벌의 특징이지만, 한화는 여기에 '기능별 전문성'이라는 카드를 더했다.

■추락과 부활의 서사

김승연 회장과 세 아들. 왼쭉부터 삼남 김동선 부사장, 차남 김동원 사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김승연의 이력에는 굵직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2007년 보복폭행 사건, 2012년 횡령·배임으로 인한 4년 실형 등 법적 리스크가 그의 레퍼런스에 깊이 각인됐다. 한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복귀 후 그가 택한 전략은 '저강도 공개, 고강도 실행'이었다. 미디어 노출은 최소화하되 내부에서는 구조개편·포트폴리오 재설계·글로벌 진출이 동시다발로 작동했다. 위기 때 후퇴하고 기회 때 확장하는 '완급조절의 기술'. 이것이 그의 생존 철학이다. 법적 리스크는 여전히 한화 거버넌스의 상수로 남아있다. 막내 김동선 부사장 역시 2017년 폭행 의혹으로 구설에 올랐다가 복귀한 바 있다. 이는 한화가 지속적으로 컴플라이언스와 내부통제 체계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계구도...삼각편대의 실험

김동관 한화그룹 차장이 2010년 11월11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서울 G20 비즈니스 서밋 개막총회에서 김승연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한화솔루션)

한화의 미래는 세 형제의 손에 달려 있다. 김동관 부회장은 '하드파워'의 총괄이다. 방산·에너지·우주·조선이라는 무거운 산업들을 지휘하며, 대형 M&A와 글로벌 조달·제휴를 이끈다. 삼성테크윈 인수부터 대우조선해양 편입까지, 한화의 판을 바꾼 굵직한 딜들이 모두 그의 영역이다. 김동원 사장은 금융 생태계의 설계자다. 보험·자산운용·증권을 하나의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고, 해외 브로커리지·핀테크와의 제휴로 '자본의 속도'를 가속화한다. 최근 미국 벨로시티 클리어링 75% 인수도 그의 작품이다. 김동선 부사장은 미래 사업의 개척자다. 유통·호텔·로보틱스·반도체 장비 등에서 실험을 주도하며, 그룹의 제조업 DNA에 서비스·경험 산업의 감도를 접목하는 역할을 맡는다. 삼각편대의 장점과 약점은 명확하다. 속도·책임·자원배분이 고속으로 맞물리면 기하급수적 시너지가 날 수 있지만, 중복투자와 사내 경쟁으로 흐르면 곧바로 비용이 된다. 핵심은 누가 '총보'를 들고 전체를 지휘할 것인가다.

■포트폴리오 빅스위치의 마술사
김승연의 결단은 늘 '빅스위치'였다. 2014~2015년 삼성 방산·화학 계열 인수로 방산·소재 체질을 급격히 고도화했고, 2023년 대우조선해양을 한화오션으로 편입하며 '해양-방산-에너지' 삼각 엔진을 완성했다.
그의 포트폴리오 철학은 이원혼합형이다. '케미칼과 금융'이라는 현금창출 전통축 위에 '방산·조선·우주·에너지'라는 신성장 축을 얹어 위험을 분산하고 배당과 성장투자의 균형을 맞춘다. 실물 제조업의 든든함과 첨단 기술의 폭발력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이다.

■'코리아의 록히드마틴'을 꿈꾸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사진=한화그룹)

한화오션 편입은 단순한 조선사 인수가 아니다. 함정·잠수함·해양플랜트·친환경 선박·MRO(정비·개조·수리)를 하나의 통합 수주공장으로 재설계하는 그랜드 플랜이다. 미국 시장 진출도 체계적이다. 필리조선소 인수로 현지 조선 거점을 확보했고, 미 해군 MRO 사업에도 발을 담갔다. "바이 아메리칸" 규정이라는 높은 장벽을 현지화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한편 Qcells(한화솔루션)은 미국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수혜를 등에 업고 조지아에서 수십억 달러급 증설을 진행 중이다. 미 에너지부로부터 145억 달러 규모 조건부 대출보증도 받았다. 태양광 풀 밸류체인을 내재화해 중국 리스크와 공급망 변동성을 동시에 줄이겠다는 계산이다.

■솔라의 논리, 거버넌스의 실력
한화의 ESG는 E(환경)에서 태양광이 논리를 제공하고, G(거버넌스)에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구조다. 한화솔루션은 2030년 Scope 1·2 배출량 35% 감축, 2050년 넷제로 목표를 공식화했다. 제조공정의 재생에너지 전환, 공급망 탄소관리, 폐모듈 재활용까지 포함하는 순환경제 로드맵도 구축했다. 하지만 방산과 조선이라는 탄소집약적 사업의 비중을 감안하면 그룹 차원의 감축 포트폴리오 최적화가 과제다. 동시에 과거 법적 이슈들로 인한 평판 리스크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ESG는 홍보가 아니라 원가·매출·투자에 스며든 실무여야 한다.

■철·불·빛 위에 알고리즘을 얹다
한화의 AI 전략은 기존 사업의 고도화에 초점을 맞춘다. 방산 분야에서는 K9A3 차세대 자주포의 자율·원격화로 인명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네트워크 중심전 대응력을 강화한다. 영상보안에서는 Hanwha Vision의 엣지 AI와 클라우드 분석을 통해 단순 보안에서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로 진화한다. 금융 부문은 샌프란시스코 AI 센터를 중심으로 로보어드바이저·리스크 모델링·고객 360도 분석을 통해 보험·증권·운용의 수익모형을 다변화한다. 우주·정찰 영역에서는 저궤도 위성 SpaceEye-T의 25cm급 고해상도 영상과 AI 판독 자동화를 방산·재난·환경 모니터링으로 확장한다. 핵심은 실물-디지털-금융의 3중 루프를 폐회로처럼 돌려 그룹 전체의 ROIC를 구조적으로 상향시키는 것이다.

■강하게 갈수록 마찰도 커진다
한화가 직면한 리스크는 다차원적이다.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삼각편대의 명확한 역할 구분과 사외이사·위원회 중심의 견제 균형이 관건이다. 규제·정책 리스크로는 미국의 조달·안보심사 요구와 유럽의 탄소 규제가 있다. 사업 사이클 면에서는 조선의 장기 사이클, 방산의 원가 연동성, 태양광의 정책 의존도를 관리해야 한다. 실행력 차원에서는 중복투자 방지와 그룹 PMO의 통합 운영이 필요하다. 평판 관리로는 과거 법적 이슈의 재점화 방지와 조직문화 개선이 지속 과제다. 리스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관리되거나 가격에 반영되거나 경쟁우위로 전환될 뿐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데이터 기반의 실행력이다.

■제국의 총감독에서 삼각편대의 실력으로

2024년 7월 12일 대전 한화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이글스와 LG트윈스의 프로여구 직관하는 김승연 회장.

한화의 향후 3년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북미 현지화의 정착. 조선·방산·태양광 모든 영역에서 현지 허브를 구축하고 MRO·부품·서비스를 내재화한다. 둘째, 조선 수익성의 방어와 가속. 수주잔고의 질 관리와 친환경 선박·해양플랜트로의 제품 믹스 개선이 핵심이다. 셋째, AI 내재화의 전사 확산. 공장·제품·고객을 하나의 데이터 플랫폼으로 묶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완성한다.

■화약에서 디지털 제국으로
김승연의 45년 리더십은 '판 바꾸기의 연속'이었다. 화약에서 케미칼로, 케미칼에서 방산으로, 방산에서 우주·조선·에너지로. 이제 그 바통이 세 아들에게 넘어간다. 그들이 '화약-철-빛-데이터'를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하는 순간, 한화는 한국 산업지형을 다시 그릴 것이다. 김승연의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세 아들의 실력으로 증명할 차례다. 그 답은 숫자로 나타날 것이다. 현금흐름, 투자수익률, 그리고 시장이 매기는 '영속성 프리미엄'으로.

이재훈의 X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