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심층리포트 3] 삼성의 '55년 금기'가 깨졌다

삼성 초기업노조 리스크  '뉴 삼성'의 거버넌스 시험대 올라

2025-10-22     이재훈 기자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삼성', 그리고 '노조'.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재계에서 가장 낯선, 어쩌면 금기시된 조합이었다. 1969년 창립 이래 55년간 철옹성처럼 지켜온 삼성의 '무노조 경영' 원칙은, 단순히 하나의 경영 방침을 넘어 '관리의 삼성'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둥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창사 이래 최초로, 그것도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하 전삼노)이 합법적인 쟁의권(파업권)을 확보하며 전면적인 '실력 행사'를 예고하고 나섰다. 2024년 임단협 결렬이라는 표면적 이유 뒤에는, 삼성의 리더십과 거버넌스를 근본부터 흔드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 숨어있다. 이는 더 이상 인사(HR) 부서의 실무적 대응 차원이 아니다. 이재용 회장이 선포한 '뉴 삼성'의 리더십이 마주한 첫 번째이자 가장 본질적인 '거버넌스 리스크'다. 이 '초기업노조'의 등장이 삼성의 경영 패러다임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향후 어떤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 CEONEWS의 시각으로 심층 분석한다.

■'보상'을 넘어 '경영 파트너'로의 격상 요구

이번 사태의 본질을 '임금 6.5% 인상'이라는 숫자로 해석하는 것은 경영자의 치명적인 오판이다. 초기업노조가 던진 메시지의 핵심은 '돈'이 아니라 '권한'과 '존중'이다. 
첫째, '노사협의회'의 종언과 '교섭 권력'의 이동이다. 삼성은 그간 법적 기구인 '노사협의회'를 통해 사실상의 임금 인상률을 결정하고 통보하는 방식을 고수해왔다. 이는 '관리'는 하되 '교섭'은 하지 않겠다는, 무노조 경영의 핵심 장치였다. 그러나 노조는 이를 '노조 패싱'이자 '들러리' 전략으로 규정했다. 그들이 쟁의권까지 확보하며 얻고자 하는 것은, 노사협의회가 아닌 노조가 임금과 보상의 '결정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권력의 재편' 요구다. 이는 삼성의 전통적인 '톱다운(Top-down)'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둘째, '불투명한 성과'에서 '공정한 분배'로의 압박이다. 경영자에게 '성과급'은 동기부여의 수단이지만, 구성원에게는 '결과의 공정성'을 판단하는 척도다. 특히 반도체(DS) 부문과 가전·모바일(DX) 부문 간의 성과급(OPI) 불균형 논란은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삼성의 대원칙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노조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공정한 보상'을 외치는 노조의 목소리는, 사실상 불투명한 성과 측정과 분배 시스템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경영 정보 공개' 요구와 맞닿아 있다.

셋째, '관리'의 조직 문화에서 '소통'의 문화로 전환하라는 경고다. 이재용 회장의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은 '말'이었지만, 현장에서의 변화는 '더뎠다'. 2만 8천 명이 넘는 조합원, 74%라는 압도적인 쟁의 찬성률은 경영진이 간과한 '조직 내부의 침묵'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MZ세대가 주축이 된 현 조직은 과거 세대처럼 회사의 일방적인 '관리'와 '시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공정성'과 '투명성'을 핵심 가치로 여기며, 이를 쟁취하기 위한 '조직화된 목소리'의 힘을 깨달았다.

■'분할 통치'의 종말과 '단일 리스크'의 부상

과거 삼성에게 노조는 '관리 가능한 소수'였다. 여러 개의 소규모 노조가 난립하던 시절, 경영진의 '분할 통치(Divide and Conquer)' 전략은 유효했다. 하지만 전삼노가 전체 직원의 20%를 넘고, DS와 DX 부문을 아우르는 '초기업노조'로 성장한 순간, 이 전략은 최악의 '전략적 실패'가 되었다. 삼성전자의 양대 축인 반도체와 모바일·가전 부문의 이해관계는 상이하다. 하지만 사측은 이 두 집단의 불만을 동시에 자극했고, 오히려 이들이 '전삼노'라는 단일대오 아래 뭉치는 '결속의 명분'을 제공했다. 흩어져 있던 '점'들의 불만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면서, 삼성 경영진은 이제 단 하나의, 그러나 너무나도 강력해진 '협상 상대'이자 '리스크 주체'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는 삼성의 노무 전략이 시대의 변화를 읽는 데 완벽히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불확실성'이라는 새로운 변수

창사 이래 첫 '파업 리스크'는 삼성의 경영 전반을 뿌리부터 뒤흔들 것이다. CEO의 관점에서 이는 세 가지 거대한 '불확실성'의 시작이다.
첫째, 단기적으로 '생산 안정성' 리스크다. '파업'이라는 단어가 삼성전자, 특히 24시간 멈춰서는 안 되는 반도체 라인과 결부되는 것 자체가 삼성에게는 재앙적 시나리오다. 실제 파업의 강도와 관계없이, '삼성도 멈출 수 있다'는 시그널은 글로벌 공급망과 고객사, 그리고 주주들에게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 '삼성 디스카운트'를 야기할 수 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이는 비즈니스 연속성 계획(BCP)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둘째, 중기적으로 '경영 효율성' 리스크다. 삼성의 초격차 경쟁력 중 하나는 '총수 중심의 신속한 의사결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주요 결정, 특히 인력 및 보상과 관련된 결정은 '노조와의 협상'이라는 변수를 통과해야 한다. 이는 의사결정 속도의 저하, 협상 비용의 증가, 그리고 인력 운영의 유연성 저하를 의미한다. '관리의 삼성'에서 '협상의 삼성'으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경영 비효율'의 비용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셋째, 장기적으로 '거버넌스' 리스크다. '초기업노조'의 등장은 삼성의 지배구조(Governance)에 '노조'라는 강력한 '내부 견제 세력'이 공식적으로 등장했음을 선포한다. 이들의 요구는 임금과 복지를 넘어, 앞서 언급한 '성과급 산정의 투명성' 요구에서 보듯, 점차 '경영의 투명성' 전반으로 확대될 것이다. 향후 구조조정, 사업 재편, M&A 등 핵심 경영 전략에 대해서도 노조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과 '뉴 삼성'의 거버넌스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뉴 삼성'의 리더십, '관계'에서 답을 찾아야

55년의 금기가 깨졌다. 삼성은 이제 '노조 없는 천국'에서 '노조와의 공존'이라는 현실로 강제 소환되었다. 이는 위기이지만, 동시에 '뉴 삼성'이 구호가 아닌 실체로 거듭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은 지금 '기술 초격차'가 아닌 '노사관계 초격차'를 증명해야 할 시험대에 올랐다. 경영진은 '초기업노조'의 등장을 '통제 불능의 리스크'가 아닌, 조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새로운 파트너'이자 '경영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관리'의 구태를 버리고 진정한 '소통'과 '협상'의 리더십을 보일 때, 비로소 삼성은 가장 다루기 힘든 이 '내부의 변수'를 혁신의 동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뉴 삼성'의 성패는 결국,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하느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