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심층리포트 4] 호반그룹의 완성된 승계, 시작된 심판
608억 원 과징금이 던진 질문 '편법 승계'는 어디까지 용인되는가?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자본금 1억 원에서 출발해 자산 16조 원, 재계 33위로 올라선 호반그룹. 30여 년의 성장 신화 뒤편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승계 구조와, 그것이 남긴 사법 리스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608억 원 과징금 부과, 법원의 일부 취소 판결, 그리고 진행 중인 배임 혐의 수사. 호반그룹의 사례는 한국 재벌 승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교과서다.
■15세 아들의 회사로 그룹을 삼키다
2003년, 당시 만 15세였던 김대헌 씨 명의로 자본금 5억 원의 비오토(현 호반건설주택)가 설립됐다. 그로부터 10년간 이 회사는 그룹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호반건설은 공공택지 23개 필지를 확보해 2세 회사로 넘겼고, 2조 6,393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지급보증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입찰 신청금 4,144억 원도 무이자로 빌려줬다. 결과는 명확했다. 2018년 비오토가 호반건설에 흡수합병되면서 김대헌 씨는 단 한 주의 증여 없이 호반건설 지분 54.73%를 확보했다. 합병비율은 1대 5.89. 증여세 한 푼 내지 않고 그룹 지배주주로 등극하는 '완벽한 승계'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외관상 정당한 기업 합병이었지만, 그 본질은 '터널링(tunnelling)'이었다. 그룹의 자원과 기회를 총수 일가의 사적 회사로 빼돌리는 전형적인 편법 승계 설계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회사를 세워주고, 그룹 자원을 쏟아붓고, 합병으로 지배권을 넘기는 3단계 공식. 이것이 호반그룹 승계의 핵심 패턴이다.
■법원이 인정한 '부당지원'의 실체
공정위는 2023년 6월, 이 승계 과정을 정조준했다.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부당지원으로 608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이다. 공공택지 전매, 무상 입찰금 대여, PF 지급보증, 건설공사 이관 등 네 가지 행위가 근거였다. 호반그룹은 즉각 반발했다. "업계 관행"이라는 논리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올해 3월 서울고등법원은 과징금 중 약 365억 원을 취소했다. 최종 과징금은 243억 원으로 줄었다. 공공택지 전매와 입찰금 대여는 부당지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면죄부는 아니다. 법원은 핵심 쟁점인 2조 6천억 원대 PF 지급보증과 936억 원대 공사 이관을 명백한 부당지원으로 인정했다. 승계 설계의 정교한 메커니즘 중 가장 핵심적인 두 축이 불법으로 확정된 것이다. 과징금 규모의 감소가 승계 행위 자체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판결이 던진 메시지다. 법원은 "총수 일가에 대한 부당지원"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사법적으로 확인했다. 한국 대기업 승계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며, ESG 시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요구한 것이다.
■배임 혐의라는 더 큰 폭풍
행정 제재보다 더 무거운 것은 형사 책임이다. 2023년 8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김상열 회장과 김대헌 총괄사장 등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논리는 명확하다. 호반건설의 자원을 2세 회사로 부당 이전해 총수 일가는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모회사에는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공정위가 불법으로 인정한 PF 보증과 사업 이관은 배임의 핵심 정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고발 1년이 넘도록 검찰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일각에서는 공소시효 만료 우려까지 제기된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과징금은 법인이 감당할 수 있지만, 형사 처벌은 총수 일가의 도덕성과 그룹 전체의 ESG 신뢰도에 직접타다. 만약 기소가 이뤄진다면 대주주 세습 지배구조의 정당성에 사법적 치명타가 될 것이다. 반대로 수사가 흐지부지된다면 '재벌 봐주기' 논란이 재점화될 것이다. 호반그룹에게 배임 혐의는 이미 청구된, 결제일만 기다리는 카드다.
■김대헌 체제의 진짜 시험
현재 호반그룹은 1988년생 김대헌 총괄사장 체제로 전환을 완료했다. 차남 김민성 상무, 장녀 김윤혜 부사장 등 2세가 주요 계열사를 분담하며 승계 구도가 확립됐다. '김대헌 2.0' 체제는 막대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건설업 외연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한전선 인수를 비롯해 서울신문, 이베스트투자증권, 대아청과 등 이종 산업 M&A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종합그룹'으로의 도약을 시도중이다. 하지만 승계 완료가 곧 경영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김대헌 체제가 넘어야 할 산은 세 가지다.
첫째, 사법 리스크 청산이다. 제재와 수사는 단순한 자금 문제가 아니라 지배구조 정당성의 근본 문제다. 둘째, 독자적 경영능력 증명이다. 시장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닌 실질적 성과를 요구한다. 셋째, ESG 지배구조 개선이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투명한 지배구조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승계는 출발점일 뿐이다
호반그룹은 '승계 완료'라는 잠깐의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하지만 진짜 경기장은 이제부터다. 과점적 지위와 내부거래로 성장한 과거를 청산하고, 투명한 지배구조와 시장 신뢰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승계는 기업의 리셋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다. 출발점이 흔들리면, 그 그림자는 끝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호반그룹의 다음 10년은 사법 리스크를 청산하고 시장 신뢰를 재획득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편법 승계의 완성은 진정한 경영의 시작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