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철의 폴리코노미 22] AI, '제2의 반도체'인가 '재정 블랙홀'인가
AI가 '국가 프로젝트'가 되는 순간 728조 예산안, 'AI 고속도로' 선언에 담긴 정치경제학적 함의와 그림자
[CEONEWS=배준철 기자] 2025년 11월 4일, 이재명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하나의 선언으로 귀결되었다. "AI 시대를 여는 첫 예산." 728조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은 AI 반도체, AI 고속도로, AI 강국 도약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되었다. 정부는 이를 '박정희의 산업화', '김대중의 정보화'를 잇는 대한민국 세 번째 도약의 신호탄이라 자평했다. 정치적 수사와 국가 비전이 천문학적 재정 배분과 만나는 지점. 바로 여기에 '폴리코노미(Policonomy)'의 핵심이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경제가 다시 정치 지형을 흔드는 거대한 순환. 우리는 지금 이 대통령의 'AI 올인' 선언을 냉철하게 해부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과연 이 거대한 재정 투입은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쓸 마중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재정 부담과 사회 양극화라는 '정치적 청구서'만 남기게 될 것인가.
■'AI 고속도로' 뒤에 가려진 정치적 셈법
정치적 선언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현시점에서 'AI'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정치 키워드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기술 냉전'의 시대. "하루 늦으면 한 세대 뒤처진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글로벌 경쟁에 대한 불안감과 동시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국가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고도의 정치 수사다. APEC 정상회의에서 확보했다는 엔비디아 GPU 26만장 이슈가 곧바로 여야의 '성과 논쟁'으로 비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AI는 이제 단순한 기술 의제가 아니라, 현 정부의 유능함과 미래 비전을 입증하는 핵심 '정치 자산'이 되었다. 728조 원 예산안은 바로 이 'AI'라는 깃발 아래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하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의 표명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정책을 넘어, 임기 중반을 지난 정부가 국정 동력을 확보하고 미래 세대에 대한 '레거시'를 구축하려는 다목적 포석이다. 문제는 이 거대한 '정치적 프로젝트'가 과연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정치적 구호가 재정 건전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압도할 때, 그 끝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728조의 향방, 'AI 양극화'를 가속하는가
'폴리코노미 21화'에서 우리는 2040년 부동산 시장의 '다중 양극화'를 경고했다. 자본과 정보, 접근성에 따라 주거 환경이 극단적으로 분화되는 현상. 이 대통령이 선언한 'AI 시대'는 이보다 더 심각한 'AI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다. 정부 예산은 필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요구한다. 'AI 고속도로' 건설과 AI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규모 재정 투입은 일부 대기업과 기술 엘리트에게 막대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대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발판 삼아 격차를 더욱 벌릴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봐야 한다. 막대한 예산이 AI와 직결된 소수 분야에 집중될 때, 전통 제조업, 중소기업, 그리고 AI 기술에서 소외된 수많은 노동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AI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테크 엘리트'에게 집중되고, 단순·반복 노동은 AI로 대체되면서 일자리의 질과 소득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이는 '폴리코노미 16화'에서 다룬 '간병 살인'과 '돌봄 노동'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AI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의 '돌봄'과 같은 비AI 분야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할 위험이 크다. 정부가 AI라는 '화려한 성장'에만 매몰되어, 그 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할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확충을 외면한다면, 728조 원의 예산은 기술 발전이 아닌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AI 관련 일자리는 전체 고용의 2% 미만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 직군의 평균 연봉은 일반 직군 대비 2.5배 이상 높다. 정부가 'AI 인재 100만 양성'을 외치지만, 실질적으로 고급 AI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인원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AI 시대의 보조 인력' 또는 'AI 대체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장밋빛 청사진'의 세 가지 함정
▲첫 번째 함정: 인재는 있는가
정부는 AI 인재 100만 양성을 외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국내 최고의 AI 인재들은 졸업과 동시에 구글, 엔비디아 등 실리콘밸리로 향한다. APEC에서 GPU 26만장을 확보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 GPU를 다룰 핵심 인재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다. 파격적인 보상, 수평적인 연구 문화, 경직된 규제 철폐 없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특히 한국의 위계적 조직 문화, 야근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노동 환경,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창의적 AI 인재들이 가장 기피하는 요소들이다. 하드웨어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인재는 환경으로 키우는 것이다.
▲두 번째 함정: 윤리와 규제는 준비되었는가
이번 시정연설에서 'AI 발전'과 '속도'는 강조되었지만, AI가 초래할 대량 실업, 데이터 편향성, 감시 사회의 위험에 대한 '제어 장치'는 언급되지 않았다. AI라는 고속열차의 액셀만 밟고 브레이크는 논의하지 않는다면, 그 열차는 결국 탈선한다. 유럽연합(EU)은 이미 'AI Act'를 통해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시행 중이다. 중국조차 AI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데이터 보호를 강조하는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만 '속도'에 집착한 채 '방향'과 '안전'을 간과한다면, 기술 선진국이 아닌 '기술 사고 다발 국가'가 될 위험이 있다. 특히 AI 기반 채용 시스템의 성차별 논란, 안면인식 기술의 프라이버시 침해, 챗봇의 거짓 정보 생성 문제 등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정치가 따라잡지 못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돌아간다.
▲세 번째 함정: 재정은 감당 가능한가
728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은 결국 '세금'이다. 이미 누적된 국가채무와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복지 재정 압박 속에서, AI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재정 블랙홀'이 될 가능성은 없는가. 정치적 구호에 밀려 경제성 평가가 무력화되고, 단기 성과에 집착한 '선심성 AI R&D'가 남발된다면, 이는 미래 세대에게 빚더미를 넘기는 무책임한 '폴리코노미'의 전형이 될 것이다. 특히 AI 프로젝트는 성공 확률이 낮고, 초기 투자 대비 회수 기간이 길다는 특성이 있다. 정치적 성과에 급급해 '보여주기식' 투자가 난무한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반도체 신화는 반복될 수 있는가
정부는 'AI 반도체'를 '제2의 반도체 신화'로 포장하지만, 1980년대 반도체 산업 육성과 2025년 AI 산업 육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1980년대 한국은 저렴한 노동력과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 그리고 글로벌 수요 급증이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시기였다. 반도체는 '만들면 팔리는' 시장이었고, 삼성과 LG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2025년 AI 시장은 다르다. 이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오픈AI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생태계를 장악하고 있다. AI는 '하드웨어'만의 싸움이 아니라 '데이터', '알고리즘', '인재', '자본'이 총동원되는 종합전이다. 한국이 GPU를 26만장 확보했다 해도, 그것을 활용할 데이터 인프라, 알고리즘 경쟁력, 글로벌 시장 접근성이 부재하다면 무용지물이다. 더욱이 반도체는 '제조업'이었지만, AI는 '플랫폼 경제'다. 승자독식 구조가 더욱 강화된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한국이 과연 어떤 포지셔닝을 가져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AI 시대'의 주도권, 정치가 아닌 '사람'에서 나와야
이재명 대통령의 'AI 시대' 선포는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폴리코노미'의 시선은 화려한 선언이 아닌, 그 이면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향한다. 진정한 'AI 강국'은 단순히 GPU를 몇만 장 더 확보하고, AI 반도체 수출액을 얼마 더 늘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AI 기술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시민을 어떻게 재교육하고 보호할 것인가, AI가 생성한 부를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 것인가, AI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도록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이러한 '사람'에 대한 고민 없이, '정치적 선언'과 '재정 투입'만으로 밀어붙이는 'AI 고속도로'는 결국 또 하나의 거대한 토목공사에 그칠 위험이 크다. 폴리코노미는 묻는다. 우리는 AI를 '정치의 도구'로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위한 기술'로 발전시킬 것인가. 728조 원의 예산안이 답해야 할 본질적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가 주도하는 'AI 혁명'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AI 시대'를 위한 근본적 성찰.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