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밸류에이션보다 ‘신뢰’가 문제다
[CEONEWS=박수남 기자] 미국 증시가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다. 단순한 주가 조정이나 일시적 급락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적 관세 폭탄이 발단이 되었지만, 본질은 더 깊은 데 있다. 이제 투자자들이 마주한 것은 '밸류에이션 착시'다. 겉으로는 싸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고평가된 자산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대표 지수인 S&P 500의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18.01배까지 하락했다. 10년 평균(18.63배)보다 낮아졌고, 1년 넘게 20배 이상에서 유지되던 밸류에이션이 깨졌다는 점에서 단기적인 매수 유인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수치가 아닌, 본질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전 세계 수입품에 일괄 1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총 145%에 달하는 초강수 관세를 단행했다. 세계 공급망은 급격히 재편되고 있고, 미국 기업들은 수익성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기업 실적 전망치를 소폭 하향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심각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BofA 증권은 미중 관세 갈등이 현 수준으로만 유지돼도 S&P 500 기업의 영업이익이 15%가량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단기적으로는 원가 회계 조정, 가격 전가 등으로 타격을 줄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전략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가이던스 실종’이다. 기업들이 앞다퉈 실적 전망 발표를 회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2분기, 미국 상장사 중 연간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한 곳은 10%에 불과했다. 당시처럼 정보 공백이 발생하면, 시장은 방향성을 완전히 잃게 된다. 투자자 신뢰 또한 무너진다.
현재의 주가수익비율(PER)이나 주식위험프리미엄(ERP) 수치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단 며칠 만에 65bp 급등하며 ERP는 0.6%대까지 추락했다. 이는 채권보다 주식을 보유할 유인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뜻이다. 특히 이런 불확실성의 시기에 투자 위험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가오는 1분기 실적 시즌은 단순한 ‘성과 발표’가 아니다. 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분수령이다. 기업들이 관세 정책에 대해 어떤 전망을 내놓는지, 공급망 재편이 수익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모든 게 향후 주가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실적 가이던스마저 사라진다면, 시장은 극단적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금 시장은 밸류에이션이 아닌, '신뢰'를 잃고 있다. 주가가 싸 보인다고 섣불리 매수에 나설 시점은 아니다. 숫자만 믿는 투자, 지금만큼 위험한 때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