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 AI 신질서의 무대가 되다

APEC CEO 서밋 2025 총평
APEC CEO 서밋 2025 총평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AI는 새로운 산업혁명이다."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무대에서 던진 이 한 문장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 2025의 본질을 압축했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세계는 다음 천년을 설계할 기술 혁명을 논의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온 2025년, 경주에서 열린 이번 서밋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AI 혁명,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긴장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파도가 이곳에서 교차했다. 경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이 성취되었으며, 어떤 과제가 남았는가. 5일간의 격론과 만찬, 그리고 강남 치킨집에서의 깜짝 회동까지, 경주 서밋의 이면을 추적했다.

■AI가 관통한 의제, 공급망이 엮은 동맹

강남 깐부치킨에서 AI 세 거물 치맥회동
강남 깐부치킨에서 AI 세 거물 치맥회동(좌측으로 이재용, 정의선, 젠슨황)

 

이번 서밋의 최대 성과는 AI와 디지털 경제를 APEC의 핵심 의제로 완전히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지난 30여 년간 APEC이 자유무역과 관세 인하를 외쳐왔다면, 2025년 경주에서는 '데이터', '반도체', 'AI 거버넌스'가 회의장을 지배했다. 젠슨 황의 방한은 그 자체로 서밋의 상징이었다.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의 80%를 장악한 엔비디아의 수장이 APEC 무대에 섰다는 것은, 기술 기업이 이제 국가만큼, 어쩌면 국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밋 기간 중 벌어진 '깐부 회동'은 이번 경주 서밋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젠슨 황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서울 강남의 한 치킨집에서 만나 치맥을 나눈 것은 단순한 친목 도모가 아니었다. 이는 'AI(엔비디아)—반도체(삼성)—모빌리티(현대차)'라는 미래 산업의 핵심 삼각편대가 구체적인 기술 동맹을 논의한 '실리 외교'의 현장이었다. 

APEC이라는 거대 담론의 장이 실제 비즈니스 협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에서, 경주 서밋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실질적이었다. 초국가적 기술 동맹을 모색하는 플랫폼으로서 APEC의 새로운 역할이 확인된 셈이다.

■공급망 안정화, 선언에서 행동으로

두 번째 성과는 '공급망 안정화에 대한 구체적 공감대 형성'이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전략 자원의 공급망 불안은 APEC 회원국 모두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경주 서밋에서는 단순한 우려 표명을 넘어, 다자간 공급망 협력 네트워크 구축 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특히 서밋 기간 중 타결된 한미 간 관세 협상은 자유무역 원칙을 재확인하고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제동을 거는 실질적 성과로 평가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 만찬 참석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미-중 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경제적 실리를 우선하는 아태 지역 특유의 실용주의가 작동했다. 정치적 이념보다 경제적 이익을 앞세우는 이 기류는, 향후 APEC이 강대국 패권 경쟁의 완충지대로 기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왜 서울이 아닌 경주였는가

APEC CEO 서밋 2025 총평
APEC CEO 서밋 2025 총평

이번 서밋이 서울이 아닌 경주에서 열렸다는 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는 '융합'과 '혁신'의 상징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경주는, 오늘날 개방과 협력을 추구하는 APEC의 가치와 정확히 겹쳐진다. 가장 전통적인 도시에서 가장 미래적인 기술인 AI를 논의한 것은 '기술과 문화의 조화',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라는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불국사와 첨성대를 배경으로 디지털 거버넌스를 토론하는 아이러니는, 역설적으로 기술 발전이 인류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만 지속 가능함을 상기시켰다. 또한 복잡한 수도를 벗어난 차분한 분위기는 당면한 경제 현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동북아에서 경주는 '평화와 협력'의 상징적 장소로 각인되었다.

■CEO 서밋 본연의 의미를 되찾다

이번 경주 서밋은 'CEO 서밋' 본연의 의미를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 간 외교 의전을 넘어, 각국 기업 총수들이 비즈니스 현안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네트워킹하고 미래 전략을 모색했다. 젠슨 황, 이재용, 정의선의 치맥 회동이 상징하듯, 격식 파괴와 실용주의가 이번 서밋을 관통했다. 이는 향후 APEC이 정부 주도의 외교 무대를 넘어,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경제 올림픽'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것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회의장 밖에서는 수십 건의 양자 회담과 기업 간 MOU 체결이 이뤄졌다. 공식 세션보다 복도와 만찬장에서의 비공식 대화가 더 중요했다는 참가자들의 증언은, APEC이 네트워킹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느슨한 협력체의 태생적 한계

뚜렷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APEC의 태생적 한계는 여전했다. 이번 서밋에서 도출된 '경주 선언' 역시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 수준에 머물렀다. 첫째, 지정학적 갈등의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미-중 양국은 AI 기술 표준과 공급망 재편을 두고 여전히 첨예한 입장 차를 보였다. 서밋 현장에서는 협력의 메시지가 주를 이뤘지만, 물밑에서는 자국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치열한 '테크 외교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 완화 불가 입장을 고수했고, 중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밀어붙였다. 이러한 강대국 간 패권 다툼은 APEC이 추구하는 '하나의 아태 공동체'라는 비전을 무색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둘째, 구체적인 이행 방안이 부족했다. '디지털 무역 활성화', 'AI 거버넌스 확립', '지속가능한 성장' 등 훌륭한 목표들이 제시되었지만, 이를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한 로드맵과 재원 조달 방안은 미흡했다. APEC의 가장 큰 약점은 실행 기구가 없다는 점이다. EU처럼 회원국을 구속할 집행위원회도, NATO처럼 분쟁을 중재할 상설 기구도 없다. 결국 경주 선언도 각국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명확하다.

■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

셋째, 중소 경제권과 개발도상국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는 지적이다. 젠슨 황 같은 빅테크 CEO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면서, APEC 회원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 경제권의 우려는 뒷전으로 밀렸다. AI와 디지털 경제로의 급속한 전환은 기술 격차가 큰 개발도상국에게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 경주 서밋에서 디지털 포용과 기술 이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지원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AI가 새로운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디지털 질서와 AI 거버넌스가 화두

경주 서밋은 끝났지만, 진짜 레이스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번 서밋은 향후 아태 지역 경제 질서가 디지털 무역과 AI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임을 명확히 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AI 기술에 대한 국제 규범 확립이다. 엔비디아의 독주에서 보듯 기술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지만, 이를 통제하고 관리할 글로벌 스탠더드는 전무하다. AI의 안전성, 투명성, 공정성을 담보할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기술 발전은 양날의 검이 될 수밖에 없다. APEC은 이 규범 논의의 중심에 서야 한다. EU가 규제 중심이라면, APEC은 산업 육성과 규제의 균형을 찾는 '아시아적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경주 선언이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차기 서밋까지 AI 거버넌스 실무 협의체를 구성하고 단계적 이행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 '깐부 동맹'은 더욱 강화된다

기술 동맹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반도체, AI, 모빌리티, 배터리 등 미래 산업의 밸류체인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 간 합종연횡은 국경을 넘어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삼성과 현대차가 확보한 '초격차 기술'을 지렛대로,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단순한 '선택을 강요받는 나라'가 아닌, 기술 동맹을 이끄는 핵심 플레이어로 거듭나야 한다. 경주 서밋은 그 가능성을 확인한 무대였다.

■미래는 가장 빠르게 '깐부'를 맺는 자의 것

APEC CEO 서밋 2025 총평
APEC CEO 서밋 2025 총평

천년고도 경주에서 확인한 것은 두 가지다. 변화의 속도, 그리고 협력의 필요성. 기술은 나날이 진화하고, 지정학은 시시각각 요동친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아남는 법은 단 하나, 가장 빠르고 유연하게 동맹을 맺는 것이다. 치맥으로 다져진 AI 동맹이 상징하듯,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깐부'를 만드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APEC CEO 서밋 2025는 그 거대한 변화의 서막을 알린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다음 무대는 어디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음 서밋에서도 가장 중요한 논의는 공식 회의장이 아닌, 어딘가의 치킨집이나 복도에서 이뤄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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