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은 40달러 돌파, 금도 사상 최고치 경신
연준 금리인하 기대감 속 안전자산 선호 현상 확산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글로벌 금융시장에 '쩐의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감이 폭발하면서, 한때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귀금속 시장이 전례 없는 랠리를 펼치고 있다. 특히 '백색 금'이라 불리는 은(銀)은 14년 만에 온스당 40달러를 돌파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금(金) 역시 사상 최고치 경신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자산 가격 상승을 넘어, 불안한 글로벌 경제와 권력의 불확실성에 대한 시장의 거대한 반란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폭주하는 귀금속, 그 뒤에 숨은 '진짜 이유'
은값이 14년 만에 온스당 40달러를 돌파한 2025년 9월 1일, 뉴욕 금융가는 축제 분위기였다. 같은 날 금 선물 가격 역시 온스당 3,500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시장은 이 모든 현상을 '미국 금리 인하'라는 단 하나의 변수로 해석했다. 일반적으로 금리는 귀금속 가격과 역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채권이나 예금의 매력이 커져 이자가 없는 금이나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금리가 내리면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금과 은으로 몰려들면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전통적인 공식이다. 하지만 이번 랠리는 단순히 금리 인하 기대감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 이면에는 더욱 복잡하고 심오한 경제적·정치적 요인들이 얽혀 있다. 빛과 그림자처럼, 표면적인 호재 뒤에 숨은 구조적 리스크를 들여다봐야 한다. 과연 이 랠리는 지속될까? 아니면 또 다른 버블의 전조인가?
■멈추지 않는 '불안'이라는 전염병
지정학적 리스크가 심화되면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중동의 불안정한 정세는 물론, 전 세계를 짓누르는 경기 침체 우려가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미국 대선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보호무역주의 확산 조짐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화폐 시스템에서 벗어나 실물자산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달러도 믿을 수 없다'는 위기감은 금과 은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리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최근 중동 분쟁과 미-중 무역 갈등 재점화는 이 불안을 증폭시켰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 재개 위협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은 에너지 가격 급등을 불러일으키며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자극했다. 여기에 유럽의 에너지 위기와 아시아의 공급망 붕괴가 더해지면서, 투자자들은 금과 은을 '최후의 보루'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지정학적 리스크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귀금속 수요를 20% 이상 끌어올렸다.
■통화 시스템에 대한 거대한 반란
지금의 금값 랠리는 전 세계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 열풍과도 궤를 같이한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고 다변화를 명목으로 달러 자산을 줄이고 금 보유량을 급격히 늘리고 있다. 이는 미국 달러 중심의 기축통화 시스템에 대한 은밀한 견제로 해석할 수 있다. 중앙은행들이 금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진짜 통화'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금의 장기적인 가치 상승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중앙은행들의 움직임은 숫자로 증명된다. 세계금협회(WGC)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중국 인민은행은 금 보유량을 2,500톤으로 늘렸고, 2025년에도 추가 매입을 계획 중이다. 러시아 역시 서방 제재로 인해 달러 자산 접근이 제한되면서 금 보유 비중을 40%까지 확대했다. 인도, 터키, 브라질 등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며 '탈달러화'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브릭스(BRICS) 국가들의 금 기반 결제 시스템 논의와도 연결된다. 비록 아직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지만, 미국 달러에 대한 대안 통화 체제를 모색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의 화폐적 가치를 재조명하게 만들었다. 만약 미 연준의 금리 인하가 현실화되면 달러 약세가 가속화될 텐데, 이는 금 가격을 4,000달러 선까지 밀어올릴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 하지만 그림자도 있다. 과도한 중앙은행 매입은 시장 왜곡을 초래할 수 있으며, 만약 달러가 예상 외로 강세를 보이면 반전이 올 수 있다. 특히 미국이 강력한 경제 정책을 통해 달러 패권을 재강화한다면, 탈달러화 움직임이 제동을 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산업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
은은 금보다 더 극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이는 단순히 투자자들의 투기적 수요를 넘어, 산업적 수요의 급증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은은 전기차, 태양광 패널 등 미래 에너지 산업의 핵심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글로벌 탄소중립 정책이 가속화되면서 은의 산업적 수요는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구리와 달리, 은은 공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수요 증가가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크다. 은은 최근 5년 연속 공급 적자를 기록하며 이미 '만성적 품귀' 현상을 겪고 있다. 구체적으로, 테슬라와 같은 전기차 제조사들의 생산 확대가 은 수요를 폭증시켰다. 2025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2,000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따라 은 소비량은 연간 1억 온스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한 대의 전기차에는 평균 25-50그램의 은이 사용되는데, 이는 기존 내연기관차의 15그램보다 2-3배 많은 양이다.
태양광 산업도 마찬가지다. EU의 그린딜 정책과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연장으로 태양광 설치가 급증하면서 은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태양광 설치 용량은 400GW에 달할 전망인데, 이는 약 4,000톤의 은을 소비하는 규모다. 여기에 5G 통신망 확산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로 인한 전자제품 수요 증가도 은 가격 상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빛 뒤에는 공급망 리스크가 도사린다. 주요 은 생산국인 멕시코와 페루의 정치 불안정과 광산 파업이 빈번해지면서, 가격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특히 세계 은 생산량의 25%를 차지하는 멕시코의 노동 분규와 환경 규제 강화는 공급 차질을 야기할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ETF 자금 유입과 개인투자자 참여
귀금속 랠리를 이끄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한 대규모 자금 유입이다. 2025년 들어 금 ETF로의 순유입액은 150억 달러를 넘어서며,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와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개인투자자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 '금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2030세대를 중심으로 한 젊은 투자자들이 귀금속 시장에 대거 유입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전통적인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주식시장의 고평가 우려와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안 투자처로 귀금속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대한 헤지(hedge) 수단으로서의 금과 은의 역할이 재평가받고 있다.
로빈후드, 코인베이스 등 온라인 투자 플랫폼들도 귀금속 거래 서비스를 대폭 확대하며 개인투자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이는 과거 기관투자자 중심이었던 귀금속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투자자들의 대거 유입은 시장 변동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각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 경쟁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넘어 국제 금융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시사한다. 중국 인민은행은 2024년 한 해 동안만 225톤의 금을 추가 매입했으며, 이는 전년 대비 87% 증가한 수치다. 중국의 총 금 보유량은 공식적으로 2,500톤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의 경우 더욱 극적이다. 서방 제재로 인해 달러와 유로 자산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면서, 외환보유고에서 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40%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전 세계 중앙은행 평균인 15%의 2.5배가 넘는 수준이다. 터키,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며 '금 쌓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70여 년간 지속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시스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된다. 비록 금본위제로의 완전한 회귀는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금이 국가 간 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재개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는 양자 간 무역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와 루블화를 사용하는 비중을 늘리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금이 가치 기준점 역할을 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최근 보고서는 이러한 변화를 "국제 통화 체제의 다극화"로 진단했다. 달러 패권이 절대적이지 않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금의 화폐적 기능이 재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은, 산업 금속에서 투자 자산으로
은의 급등은 금보다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은은 귀금속이면서 동시에 산업 금속의 성격을 갖고 있어, 투자 수요와 산업 수요가 동시에 작용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글로벌 그린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은의 산업적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번 랠리의 핵심 동력이다.
전기차 배터리와 인버터, 태양광 패널의 전도체, 5G 기지국의 핵심 부품 등에 은이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국제은협회(Silver Institute)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산업용 은 수요는 전년 대비 15% 증가한 6억 8,000만 온스에 달할 전망이다. 특히 태양광 산업만으로도 1억 5,000만 온스의 은을 소비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전체 은 공급량의 15%에 해당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급 부족 현상이다. 은은 주로 구리, 납, 아연 등 베이스메탈 채굴의 부산물로 생산되는데, 최근 이들 광산의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은 공급도 함께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주요 은 생산국인 멕시코와 페루의 정치적 불안정과 환경 규제 강화가 공급 차질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은 시장의 구조적 변화도 주목할 점이다. 과거에는 사진 필름, 식기 등 전통적인 용도가 주를 이뤘지만, 이제는 첨단 기술 산업이 은 수요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이는 은의 가격이 단순히 투자 심리에만 좌우되지 않고, 실제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에 연동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의 엇갈린 전망: 지속 vs 조정
귀금속 시장의 미래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강세론자들은 현재의 랠리가 장기 추세의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골드만삭스는 금 가격이 연말까지 온스당 3,80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으며, 바클레이즈는 은이 50달러를 돌파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신중론자들은 현재의 급등이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모건스탠리의 분석에 따르면, 금의 현재 가격은 이미 향후 2년간의 기대 수익을 선반영한 상태라는 것이다. 특히 ETF를 통한 투기적 자금 유입이 펀더멘털을 벗어난 가격 급등을 초래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 시장에 미치는 영향: 기회 vs 위험
국내 투자자들에게 이번 귀금속 랠리는 새로운 기회이자 동시에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달러 표시 귀금속 투자의 수익률이 더욱 확대되었다. 실제로 국내 금 ETF의 올해 수익률은 25%를 넘어서며, 코스피 지수를 크게 앞서고 있다. 국내 귀금속 거래량도 급증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5년 8월 금 선물 거래량은 전년 동월 대비 180% 증가했으며, 은 선물은 무려 250% 늘었다. 개인투자자들의 참여도 크게 늘어 전체 거래량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어섰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귀금속 투자는 높은 변동성을 수반하며, 특히 원화 표시 수익률은 환율 변동에 크게 영향받는다. 또한 국내 귀금속 ETF의 경우 환헤지되지 않은 상품이 대부분이어서 환율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최근 귀금속 가격 급등이 수입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어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전자제품과 태양광 산업에서 은 사용량이 많은 국내 제조업체들에게는 원자재비 상승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랠리를 위협하는 그림자들
귀금속 랠리가 지속되려면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가장 큰 변수는 미 연준의 통화 정책이다. 만약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끈질기게 지속되거나 경제가 견조한 성장세를 보인다면, 연준은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이 경우 달러 강세와 함께 귀금속 가격 조정이 불가피하다. 지정학적 리스크의 변화도 중요한 변수다. 현재 중동 분쟁이나 미-중 갈등이 예상보다 빠르게 해결될 경우,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종료되거나 중동 지역에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면, 지정학적 프리미엄이 사라지면서 금 가격에 하방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 금과 은 모두 단기간에 급격히 상승하면서 과매수 구간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상대강도지수(RSI)가 70을 넘어서며 기술적 조정 압력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대체 투자처의 등장도 변수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가 '디지털 금'으로 불리며 젊은 세대의 안전자산 수요를 일부 흡수하고 있다. 특히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이후 암호화폐 시장으로 유입되는 자금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귀금속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는 법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에서 투자자들에게 신중한 접근을 당부하고 있다. 귀금속 투자의 장기적 전망은 밝지만,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변동성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포트폴리오 구성 측면에서는 분산 투자가 핵심이다. 전체 자산의 5-10% 정도를 귀금속에 배분하되, 금과 은의 비중을 7:3 정도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은 안정성을, 은은 성장성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에게 적합하다. 투자 방법도 다양하게 고려해야 한다. 실물 투자, ETF, 선물, 광산주 등 각각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의 투자 성향과 목표에 맞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실물 투자는 보관비용과 유동성 문제가 있지만 직접 소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ETF는 편의성이 높지만 환율 리스크에 노출된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현재처럼 급등한 시점에서는 한 번에 큰 금액을 투자하기보다는 분할 매수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것이 좋다. 특히 단기적인 조정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유 자금으로만 투자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 질서의 변화 신호탄
이번 귀금속 랠리가 단순한 시장 현상을 넘어 주목받는 이유는 글로벌 경제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의 독점적 지위에 균열이 생기면서, 국가들이 대안 자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금과 은이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탈달러화' 움직임은 단순한 경제적 계산을 넘어 지정학적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경제 제재를 우회하고 자국 통화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려는 시도가 금 매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향후 국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달러 중심 체제가 약화되면서 환율 변동성이 커지고, 이는 글로벌 무역과 투자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가져올 수 있다. 동시에 금과 같은 실물 자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투자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다.
■기술 혁신이 만드는 미래 산업의 핵심 소재
귀금속, 특히 은의 미래 가치를 좌우할 또 다른 핵심 요소는 기술 혁신이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와 함께 데이터센터 건설이 급증하면서 전자 부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엔비디아, AMD 등 반도체 기업들의 고성능 칩 생산 확대는 은 소비량을 크게 늘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자율주행차 시대의 본격화도 은 수요 증가의 새로운 동력이다. 완전 자율주행 차량에는 기존 차량보다 10배 이상 많은 센서와 전자 부품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이 은을 기반으로 한다. 테슬라는 2030년까지 연간 2,000만 대의 전기차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는 연간 5,000톤 이상의 은 소비로 이어질 전망이다. 의료 분야에서도 은의 활용도가 급증하고 있다. 항균 효과가 뛰어난 은 나노입자는 의료기기, 상처 치료제, 항균 코팅재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고령화 사회 진입과 함께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항균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세계 최대 소비국 중국의 움직임
중국은 전 세계 금 소비량의 30%, 은 소비량의 15%를 차지하는 최대 소비국이다. 중국 경제의 회복 속도와 정책 방향은 귀금속 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최근 중국 정부가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위한 정책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부동산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귀금속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의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금테크' 열풍이 거세다. 상하이 금거래소의 일일 거래량은 올해 들어 평균 40% 증가했으며, 특히 젊은 층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중국의 Z세대들이 주식이나 부동산 대신 금과 은을 안전한 투자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는 언제든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변수다. 만약 중국이 부동산 시장 부양책을 대폭 확대하거나, 주식시장 활성화를 위한 강력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귀금속에서 다른 자산으로 자금 이동이 일어날 수 있다.
■인플레이션과의 복잡한 관계
전통적으로 금과 은은 인플레이션 헤지 자산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시기에 금값은 20배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귀금속 가격 상승 자체가 원자재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은의 경우 산업용 수요가 크기 때문에, 가격 상승이 전자제품과 태양광 패널 등의 제조비용을 높여 최종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상 압력을 높여 귀금속 가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악순환 구조를 만들 위험이 있다. 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도 최근 기자회견에서 "원자재 가격 급등이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이는 귀금속 투자자들이 면밀히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랠리의 미래, 그리고 투자자들이 알아야 할 것
결국 이번 귀금속 랠리는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 질서의 대전환을 반영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미국 달러 패권의 약화, 지정학적 불안정 심화, 그린에너지 전환 가속화라는 거대한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변동성을 각오해야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구조적 상승 요인들이 견고하다. 특히 은의 경우 산업 수요 증가와 공급 부족이라는 펀더멘털이 뒷받침되고 있어 금보다 더 큰 상승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맹목적인 낙관보다는 냉정한 분석을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 귀금속은 여전히 변동성이 큰 자산이며, 특히 국내 투자자들은 환율 리스크까지 고려해야 한다. 적절한 포트폴리오 비중 조절과 분할 매수를 통한 리스크 관리가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랠리가 일시적인 투기 열풍이 아니라 새로운 투자 패러다임의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실물 자산의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과연 이 랠리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인가, 아니면 또 다른 위기의 전조인가? 투자자들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봐야 할 때다. '쩐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감정이 아닌 데이터로, 추측이 아닌 팩트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 시장이 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