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혁신가'인가? '고독한 승부사'인가?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한국 재계의 판도를 바꾸는 인물이 있다. 바로 SK그룹 최태원 회장(64)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젊은 총수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그는, 단순한 기업 경영자를 넘어선 '파괴적 혁신가'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슴 아픈 가정사와 복잡한 승계 구도, 그리고 '이혼'이라는 개인사의 폭풍이 끊임없이 그를 흔들고 있다. 그의 삶은 SK그룹 60여 년 역사의 축소판이자, 동시에 한국 재벌가의 명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과연 최태원은 '파괴적 혁신가'로서 SK의 미래를 열어젖힐 수 있을까, 아니면 '고독한 승부사'로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 할까. 그의 X파일을 지금부터 파헤쳐본다.
■굴곡진 가계도와 '승계'의 덫
최태원 회장은 1960년 SK그룹 창업주 고(故) 최종건 회장의 조카이자, 2대 회장인 최종현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도는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SK그룹의 복잡한 승계 구조가 숨겨져 있다. 1953년 선경직물로 출발한 SK그룹은 창업주 최종건 회장이 1973년 갑작스럽게 타계하면서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았다. 이는 재벌가의 전통적인 '장자 승계'를 깨뜨린 첫 번째 사례였다. 최종현 회장은 이후 30여 년간 그룹을 이끌며 SK를 국내 3위 대기업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최태원 회장은 이런 특수한 배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3대 승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91년 SK에 입사했다. 이후 SK텔레콤, SK에너지 등 주요 계열사에서 실무를 익히며 승계 작업을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외환위기 속 긴급 승계
그러나 그의 승계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 이뤄졌다. 1998년 아버지 최종현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하면서, 당시 38세의 최태원은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그룹의 수장이 되어야 했다. 당시 SK그룹은 막대한 부채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최태원 신임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그룹 구조조정에 나섰다. 비핵심 계열사를 매각하고, 부채 비율을 낮추는 등 '생존'을 위한 고강도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룹을 살리느냐, 무너뜨리느냐의 기로였죠." 최 회장이 훗날 회고한 말이다.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하며 '위기 경영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동생들과의 '협력적 경영'
최근 들어 최태원 회장의 동생들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둘째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은 SK이노베이션과 SK온을 담당하며 배터리와 친환경 사업을 이끌고 있고, 사촌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은 바이오와 투자 사업을 맡고 있다. 이는 기존 재벌가의 '일인 지배' 구조와는 다른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SK그룹이 '장자 승계'의 전통을 깨고, 능력과 역할에 따른 '분산 경영' 체제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김우찬 원장은 "SK그룹의 경영 구조는 다른 재벌과 달리 상대적으로 전문 경영인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특징을 보인다"며 "이는 최태원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혼'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이 소송의 발단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회장이 혼외 관계로 얻은 자녀의 존재를 공개하면서 파장이 시작됐다. 노소영 관장은 2017년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이후 8년째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이 사회적 관심을 끈 것은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 분할 때문이다. 최 회장의 재산은 SK 계열사 지분을 중심으로 수조 원 규모로 추정되며, 만약 법원이 상당한 규모의 재산 분할을 명령할 경우 SK그룹의 지배 구조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엇갈린 여론: 솔직함 vs 도덕성
이혼 소송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긍정적 시각에서는 최 회장이 자신의 개인사를 숨기지 않고 공개한 점을 '솔직한 리더십'으로 평가한다. 기존 재벌 총수들이 사생활을 철저히 감춰온 것과 달리, 그는 복잡한 상황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때 '국민 기업인'으로 존경받던 아버지 최종현 선대 회장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가족을 버린 총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보수적 성향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2%가 "기업 총수의 도덕성이 기업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이는 최 회장의 개인사가 SK그룹 전체의 평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경영권에 미치는 영향
더 심각한 문제는 이혼 소송이 SK그룹의 경영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다. 만약 법원이 상당한 규모의 재산 분할을 명령할 경우, 최 회장의 계열사 지분율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이는 그룹의 안정적 지배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요인이다. 특히 SK텔레콤과 SK이노베이션 등 핵심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될 경우, 향후 그룹 전체의 전략적 의사결정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대주주의 지분 변동은 기업의 지배 구조와 경영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특히 재벌 그룹의 경우 더욱 민감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딥 체인지'의 승부사...M&A로 그룹 체질 개선
최태원 회장을 '파괴적 혁신가'로 만든 것은 그의 과감한 M&A 전략이다. 그가 추진한 굵직한 인수합병들은 SK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2012년 하이닉스 인수다.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하이닉스를 3조6,000억 원에 인수한 이 결정은 업계에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과 막대한 인수 비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SK하이닉스로 사명을 바꾼 후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해 현재 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로 자리잡았다. 특히 AI와 데이터센터 수요 급증으로 SK하이닉스의 기업 가치는 100조 원을 넘어섰다. 최 회장은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반대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했다"며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핵심이라고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AI 전환의 대담한 선택
최근 최 회장이 추진하는 또 다른 '딥 체인지'는 SK텔레콤의 AI 기업 전환이다. 올해 그는 "SK텔레콤을 AI 컴퍼니로 완전히 탈바꿈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SK브로드밴드와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으며, AI 데이터센터와 AI 반도체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 시각에서는 통신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선제적 전략이라고 본다. AI가 모든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시점에서 기존 통신사의 인프라와 AI 기술을 결합하면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시각도 있다. AI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로 수익성이 불확실하고,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승산이 있느냐는 의문이다. 또한 막대한 투자 비용 대비 실질적 성과를 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ESG 경영의 선두주자
최 회장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2021년 그는 'ESG 경영 선언'을 통해 "ESG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강조했다. SK그룹은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0만 톤 감축하고, 2050년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수소 생태계 구축에 1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재생에너지 사업도 대폭 확대하고 있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이 분사한 SK온은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글로벌 3위 업체로 성장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지에 생산 기지를 구축하며 친환경 모빌리티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ESG 경영이 '그린워싱'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실질적인 성과보다는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마케팅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막대한 투자에 비해 아직 가시적인 수익이 나오지 않고 있어, 주주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래를 향한 비전...'따로 또 같이' 경영 철학
최태원 회장이 제시하는 미래 비전의 핵심은 '따로 또 같이'다. 이는 그룹 내 각 계열사가 독립적으로 경영하면서도, 그룹 차원의 시너지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기존 재벌의 '수직적 통제' 방식과 달리, SK는 각 계열사 CEO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고 있다. 대신 그룹 차원에서는 투자 의사결정과 전략 방향을 조율하는 역할에 집중한다.최 회장은 "21세기는 속도가 생명인 시대"라며 "중앙 집권식 의사결정으로는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경영 방식은 실제로 각 계열사의 전문성을 높이고 빠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AI가 이끄는 SK의 미래
최 회장은 "AI는 SK의 미래이자 생존 전략"이라고 공언한다. 그는 SK텔레콤을 중심으로 AI 기술을 그룹의 모든 사업 영역에 접목하려 한다. AI 반도체, AI 헬스케어, AI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기반 신사업을 발굴하고 있다. 특히 SK텔레콤이 개발한 거대언어모델(LLM) 'A.'는 한국어 특화 AI로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AI 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해 B2B와 B2C 시장을 동시에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AI 시장에서의 성공은 아직 미지수다. 오픈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이미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SK가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글로벌 확장과 도전
최 회장은 SK를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미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고, SK온도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올해에는 미국 AI 스타트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발표하며 글로벌 AI 생태계에서의 존재감을 키우려 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와 유럽 시장에서도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진출에는 많은 위험 요소가 따른다. 각국의 규제와 문화적 차이, 현지 경쟁사들과의 경쟁 등이 변수다. 특히 최근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반도체와 AI 분야의 사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어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 재계의 나침반 '최태원' 미래
25년간 SK그룹을 이끌어온 최태원 회장의 궤적을 되돌아보면, 그는 분명 '파괴적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다. 외환위기 극복, 하이닉스 인수, AI 전환 등 굵직한 결정들은 모두 SK그룹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여전히 '이혼'이라는 개인사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이는 그를 '고독한 승부사'로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가족과의 불화, 사회적 비판, 경영권 불안정성 등은 그가 감내해야 할 무거운 짐이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멈추지 않고 있다. AI 시대를 준비하고, ESG 경영을 선도하며,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단순한 '2세 총수'를 넘어선 '진정한 기업가'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연 그는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SK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개인적 상처와 사업적 위험 속에서 쓰러질 것인가.
최태원 회장의 앞으로의 행보는 한국 재계의 미래를 점치는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괴적 혁신가'와 '고독한 승부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최태원 회장의 마지막 승부수는 무엇이 될까. SK그룹의 새로운 100년 역사를 써내려갈 그의 다음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