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제국의 '일본 DNA'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제국은 때로는 피로 세워지고, 때로는 초콜릿으로 포장된다." 한국 재계에서 가장 복잡한 DNA를 가진 롯데그룹. 그 중심에 있는 신동빈 회장(70)은 과연 누구인가. 달콤한 과자로 시작해 매출 100조원 거대 유통제국을 일군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보면, 글로벌 경험으로 무장한 냉철한 전략가와 끝없는 가족 분쟁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모습이 교차한다. 이재훈의 X파일 5화에서는 신동빈의 출생부터 현재까지, 그가 걸어온 험난한 왕좌의 길을 추적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글로벌 DNA

신격호와 신동빈 부자
신격호와 신동빈 부자

1955년 2월 14일, 도쿄. 발렌타인데이에 태어난 신동빈의 운명은 어쩌면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아버지 신격호는 일본 땅에서 껌 하나로 제국을 세운 전설적 창업주였고, 어머니 시게미쓰 하츠코는 그가 하숙하던 일본 가정의 딸이었다. 신동빈의 어린 시절은 부유했지만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아버지 신격호의 교육철학은 철저했다. "부잣집 아들이라고 해서 안주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형 신동주와의 경쟁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누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은 신동빈의 평생 숙제가 됐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한 그의 이력은 전형적인 '글로벌 엘리트' 코스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1980년대 노무라증권에서 쌓은 금융 실무 경험이었다. 여기서 그는 숫자로 말하고 데이터로 판단하는 냉철함을 체득했다.
1988년 일본 롯데 입사. 상사 부문에서 원자재 수출입을 담당하며 유럽과 미국 법인을 돌아다닌 그는 글로벌 유통의 맥을 짚었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롯데를 아시아 최대 유통업체로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 그의 개인사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만, 1984년 결혼한 배우자 시게미쓰 마나미는 일본 유명 정치가 가문 출신으로 롯데의 '일본 네트워크'를 더욱 공고히 했다.

■복잡한 가계도가 만든 '형제의 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롯데 가계도를 들여다보면 한국 재벌 중 가장 국제적이면서도 가장 복잡하다. 신격호의 첫 부인 노순화와의 사이에 장녀 신정숙이 있고, 일본에서 만난 시게미쓰 하츠코와의 사이에 신영자, 신동주, 신동빈이 있다. 여기에 '중국 내연녀' 서미경과의 딸 신유미까지 더해지면서 승계구도는 더욱 얽혔다. 원칙은 단순했다. 장자 신동주는 일본 롯데를, 차남 신동빈은 한국 롯데를 맡는 '형제 분업'이었다. 하지만 신격호의 치매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2015년 '형제의 난'은 단순한 경영권 분쟁을 넘어 한국 재계사에 길이 남을 피의 복수극이었다. 신동주가 아버지를 앞세워 신동빈을 해임하려 했지만, 신동빈의 반격은 더 치밀했다.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지배력을 확보하며 형을 완전히 축출한 것이다. 현재 롯데지주 지분은 신동빈 13.4%, 신동주 0.9%로 격차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신동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2025년 7월, 다시 144억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법적 리스크와 이미지 타격

신동빈의 가장 큰 약점은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이다.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출연한 혐의로 2018년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2019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법적 처벌을 넘어 롯데의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타를 날렸다. "롯데는 일본 기업이다"라는 여론의 시선은 신동빈에게 가혹했다. 일본 불매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2019년, 롯데마트 매출은 급감했고 롯데제과 제품들이 마트 진열대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신동빈이 공식 석상에서 한국어 발음이 부정확할 때마다 "일본인 회장" 논란이 재점화됐다. 형제 분쟁 관련 소송만 해도 수십 건이다. 2015년 신동주의 해임 무효 소송부터 시작해 2025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주대표소송까지. 롯데는 "법정 다툼의 무덤"이 됐다. 이 모든 소송이 롯데의 지배구조를 흔들며 투자자들의 불신을 키웠다.

■M&A로 제국을 키운 승부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017년 10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롯데지주 주식회사 출범식에서 롯데지주 사기를 흔들고 있다(사진=롯데그룹)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017년 10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롯데지주 주식회사 출범식에서 롯데지주 사기를 흔들고 있다(사진=롯데그룹)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동빈의 진가는 M&A에서 나타났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타고난 승부사였다. 2010년대 롯데케미칼의 말레이시아 타이탄케미칼 인수(8000억원), 2015년 코리아세븐 합병(2조원) 등으로 그룹 규모를 급격히 키웠다. 특히 유통업 M&A에서 그의 안목이 빛났다. 편의점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업계 전망을 뒤엎고 세븐일레븐을 인수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현재 세븐일레븐은 편의점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 백화점, 마트, 편의점을 모두 장악한 '유통 트라이앵글'을 완성한 것이다. 2020년대 들어서는 바이오와 헬스케어로 눈을 돌렸다. 2022년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 지분 투자, 2024년 AI 스타트업 연이은 인수 등 총 M&A 규모는 10조원을 훌쩍 넘는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ESG와 AI로 향하는 미래 비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2040 탄소 중립" - 2021년 신동빈이 선언한 이 목표는 롯데의 미래 방향을 보여준다. 롯데케미칼의 재활용 플라스틱 사업, 롯데정밀화학의 그린 암모니아 투자 등 환경 부문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ESG 경영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시대, 롯데는 뒤처지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AI 전략은 더욱 공격적이다. 2023년 도입한 AI 플랫폼 '아이멤버'는 그룹 내에서 15만회 사용됐고, 롯데케미칼의 AI 컬러매칭 시스템으로 생산성을 50% 향상시켰다. 롯데백화점의 AI 고객 분석 시스템은 개인 맞춤형 서비스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우리는 유통회사에서 테크 기업으로 변신해야 한다" - 신동빈의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2025년 롯데이노베이트를 통한 AI 고도화 작업은 롯데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프로젝트다. 바이오, 모빌리티, 메타버스까지 롯데의 사업 영역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

■3세 승계, 신유열의 부상

신유열 롯데케미칼 상무 (사진=롯데지주)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 (사진=롯데지주)

1986년생 신유열. 신동빈의 장남인 그는 롯데 3세 승계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 런던 출생으로 글로벌 교육을 받은 그는 JP모건 애널리스트 출신답게 금융 감각이 뛰어나다. 2016년 롯데 입사 후 롯데케미칼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신동빈은 "장자 승계가 아닌 능력 중심"을 강조하지만, 신유열의 승진 속도는 '혈통 우선'이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신유열이 맡고 있는 바이오와 모빌리티 사업은 롯데의 미래 성장동력이다. 과연 그가 할아버지 신격호의 창업 정신과 아버지 신동빈의 글로벌 경영 감각을 동시에 이어받을 수 있을까?

■냉철한 전략가 vs 가족 분쟁의 피해자

신동빈 롯데 회장(사진=롯데)
신동빈 롯데 회장(사진=롯데)

신동빈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아버지 신격호의 '도전 정신'과 일본 어머니의 '정밀함'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리더다.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강조하고, M&A로 제국을 확장시킨 냉철한 전략가의 면모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끝없는 가족 분쟁에 시달리는 한 인간이기도 하다. "형제가 법정에서 만나는 것보다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그가 한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AI와 바이오로 롯데를 미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 아니면 가족 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롯데는 신동빈 체제 하에서 매출 100조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형제 갈등과 법적 리스크라는 그림자는 여전하다. "일본 기업"이라는 꼬리표도 완전히 벗지 못했다. 과연 그는 롯데를 진정한 글로벌 강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답은 앞으로 5년이 말해줄 것이다. 3세 승계, AI 전환, ESG 경영까지. 신동빈 앞에는 너무나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X파일은 그의 마지막 승부수를 계속 지켜볼 것이다.

저작권자 © 씨이오데일리-CEODAILY-시이오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