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조성일 기자] “신이 이제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어찌 ‘직분’을 잃은 대간과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용납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를 파직하여 다시 언로를 여십시오.”
1515년(중종 10년) 11월 22일, 서른네 살 나이로 늦깎이 벼슬길에 나선 정암 조광조(1488~1544)가 올린 상소이다. ‘직분’을 다하지 못한 사간원과 사헌부의 대간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으니 그만두게 하라는 요구다.
사간원의 맨 말직인 일개 초임 정언의 이 요구가 가당키나 한 건가는 논외로 치자. 그가 이들 대간을 파직해야 하는 이유로 든 ‘직분’으로 얘기를 좁혀보자. 대간들이 도대체 어떻게 ‘직분’을 잃었기에 조광조는 자기의 직까지 걸었을까.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연산군의 이복동생 중종이 왕이 된 지 10여 년쯤 되자 자기 정치를 하고 싶었다. 반정 삼대장(성희안, 박원종, 류순정)으로 상징되는 권력자들이 죽었고, 이제 정치가 뭔지도 알 거 같았다.
이에 중종은 천하무적의 훈구파를 견제해야 비로소 자기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림파를 등용했고, 조광조는 사림파의 리더였다.
그런데 정치란 게 생각대로 뜻대로 되지 않은 생물이 아닌가. 이때 천둥 번개가 치며 재변이 일어나서 나라 안팎에 어지러웠다. 그러자 중종은 어려운 국정을 타개하기 위해 구언(求言, 신하에게 널리 의견을 구하는 것)을 요청했다.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가 김정(金淨)이 중종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를 올린다. “임금 앞에서 열어보소서”라고 적힌 겉봉이 꼼꼼하게 풀칠 돼 있었다. 중종이 조심스럽게 상소를 폈다.
“지금 내정의 주인이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계기로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를 중전의 자리에 앉히시면, 천지의 마음이 흠향할 것이요, 조종의 신령이 윤허할 것이고, 신민의 희망에 부응할 것입니다.”
신씨를 중전에 앉히라니…. 상소를 읽던 중종의 손이 떨렸다. 이 문제는 그동안 누구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금기 아닌가. 중종은 승정원에 이 상소를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 있겠는가.
이때 중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인종을 낳다가 사망하여 중전을 새로 간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따로 새 중전을 간택하기보다는 아무 죄 없이 폐비가 된 조강지처 신씨(반정에 반대했던 신수근의 딸)를 다시 불러오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 문제는 엉뚱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문제 삼은 거다. 조정이 시끄러웠다.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 김정과 박상을 벌주어야 하는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거다. 더 가관인 건 대간들이 앞장섰다.
그러자 조광조가 문제의 상소를 올리며 등장했다. 조광조는 백번 양보해 여느 신하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언로를 담당하는 대간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벌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처벌이 부당하다고 맞서는 게 대간들의 직분 아닌가.
대간의 직분은 언로를 여는 거다. 더욱이 구언 상소는 임금이 의견을 구한다고 해서 응한 것이므로 채택하거나 말거나 하면 된다. 낸 의견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처벌한다면 누가 의견을 내겠는가. 언로가 막히면 권력자들의 전횡이 판칠 게 뻔하잖은가.
요즘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대행’의 꼬리표를 단 자들이 은근슬쩍 꼬리표를 떼고 그 직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눈살만 찌푸리게 하면 그래도 참겠는데, 아니 아예 나라를 제 것인 양 맘대로 쥐락펴락하려 하지 않은가. 이들은 조선 시대 '개혁의 아이콘' 조광조가 자기 직을 걸고 투쟁했던 직분의 의미가 뭔지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논어 ‘안연 편에 보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구절이 나온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하라는 의미다. 이 ‘답게’의 정신은 곧 ‘직분’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된다. ‘대행’들이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말고 직분에 충실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