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은 틀렸다
요즘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화두가 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제대로 되질 않는다.
탄핵 된 전직 대통령이란 사람이 수사와 재판받는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일 거다. 정말로 잘못한 게 없으면 수사기관(특검)에 나가서 당당하게 주장하면 될 터이다. 그러고 이미 기소된 사건도 법정에 출두해 성실하게 재판받으면 죄 없음이 드러날 거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 죄를 판단한다. 아무 잘못이 없으므로 수사기관에도 재판정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기다.
우리 솔직해지자. 그가 과연 잘못한 게 없을까. 그 역시 자기 잘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록 9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었더라도 검사는 검사 출신 아닌가. 우리네 소시민보다 법에 대해 더 많이 잘 알 거다.
그렇다면 굳이 법조문을 갖다 대지 않고 상식으로 보더더라도 그의 잘못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판단도 소시민의 무식한 탓이라고 치부한다면, 좋다. 우리나라에서 법조문 해석에 가장 뛰어난 능력이 있는 헌법재판소가 그를 죄가 있다고 탄핵까지 했잖은가.
그야 당사자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를 합법적으로 도와주는 변호사들의 기상천외한 억지 주장도 그렇다 치자. 그런데 소위 많이 배우고 잘 났다는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양비론(兩非論으로 싸잡아 비난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내가 여기서 그들의 주장을 양시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포장한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탄핵 된 당사자와 거의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일방적인 주장 아닌가.
아무튼 이들은 그의 잘못은 민주당의 무소불위의 의회 권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도 잘못이고 민주당도 잘못했다는 거다.
한번 따져보자. 무소불위의 의회 권력이라는 주장이 과연 맞을까. 국회의원은 누가 뽑는가. 국민이 투표로 뽑는다. 그 얘기는 국민이 원하는 일을 할 대표로 민주당을 택했다는 의미 아닌가. 그렇다면 민주당이 하려는 법안과 정책은 국민의 의사와 이익에 가장 가깝다.
반면 국민의힘의 과반 미달의 의원 수는 그동안 제대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질책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억지 주장을 한다.
어디 한번 따져보자. 그들이 말하는 양비론이라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지를 말이다.
일단 중립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영혼의 무게만큼이라도 한쪽이 더 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위험성을 무릅쓰고 말하면, 더 큰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다. 여기서 위험성이라고 한 건 자칫 악을 그대로 용인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런 걸 걷어내고 액면 그대로 바라보면 그렇다는 거다.
그들이 말하는 양비론으로 설명하면, 둘 중 누군가의 잘못이 더 크다는 얘기와 맞닿는다. 그 얘기는 누군가의 것이 더 옳다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이 논리는 ‘객관’이란 논리에도 적용된다. 과연 정말 객관이란 게 존재할까. 흔히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객관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기사의 주어를 ‘기자’라는 위장된 3인칭(객관)으로 쓰지 말로 차라리 1인칭(주관)으로 쓰자고.
양비론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면 어떨까. 그럼 내가 잘했느니, 네가 잘못했느니 하며 벌이는 소모적 악다구니가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의 원리에 너무 따르다 보면 의미 있는 소수가 설 자리를 잃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양비론의 면도칼 같은 적용은 자칫 소수를 짓밟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건 제발 소모적 논쟁일랑 그만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가 보더라도 잘못이 명백함에도 박박 우겨서 억지로 양비론에 끌어들이는 이런 비신사적 행위 따윈 설 자리를 잃어야 하기에.
다시 말한다. 양비론은 틀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