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이 곧 교부인가”

전영선 CEONEWS 기자
전영선 CEONEWS 기자

[CEONEWS=전영선 기자] SK하이닉스의 근로계약서 미교부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제보에 따르면 회사는 수년간 다수 직원에게 근로계약서를 실제로 교부하지 않았고, 고용노동부는 “사내 시스템에서 열람이 가능하면 교부로 본다”는 유권해석을 근거로 사건을 ‘혐의 없음’으로 종결했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는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열람과 교부는 다른 개념이다. 열람은 접근성의 문제이고, 교부는 근로자가 문서를 보관·증빙할 수 있게 하는 권리의 문제다. 감독기관이 이 경계를 흐리는 순간, 노동법의 최저선은 흔들린다.

근로계약서 교부의 취지는 단순하다. 임금체계, 근로시간, 수당, 휴게·휴일 등 핵심 조건을 근로자가 확정적으로 인지하고 영구 보관하도록 보장하는 데 있다. 사내망에서 잠시 열람하는 방식은 회사가 접근권을 제한하거나 시스템을 변경하는 즉시 무력화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열람=교부’라면, 교부 의무는 사실상 임의 조항으로 전락한다. 일반 기업에 적용돼 온 “근로자가 지정한 정보처리시스템으로의 발송 등 보관 가능한 형태”라는 기준과의 정합성도 따져야 한다. 특정 사건에서만 느슨한 잣대가 등장했다면, 그 과정과 근거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행정 신뢰의 출발점이다.

이번 사안은 대기업과 감독기관 사이의 ‘유착’이라는 자극적 프레임으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법 앞의 평등이다. 정부가 주관한 각종 포상과 ‘일자리 으뜸기업’ 선정 이력이 조사·수사에서 완충재처럼 작동했다면, 상훈 제도의 공정성 자체가 손상된다. 상훈은 성과의 결과이지, 법 위반 의혹의 방패가 아니다. 오히려 ‘모범’이라는 칭호를 얻은 기업일수록 더 높은 투명성 기준을 요구받는 것이 시장의 상식이다.

제보 내용은 근로계약서 교부 문제를 넘어 임금체불, 근로시간 미명시, 전자서명 위조 및 개인정보 침해 의혹 등 26개 항목에 이른다고 한다. 수사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의혹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절차가 중요하다. 기관 간 이첩과 분리, 지연이 반복되면 피해자와 공익신고자가 시간의 비용을 떠안는다. 신고자 보호는 구호가 아니라 속도·비밀성·생계 보호라는 실효성으로 증명돼야 한다. 공익을 위한 내부 제보가 커리어 파괴로 귀결되는 구조라면, 다음 제보자는 침묵을 선택한다.

노동법의 최저치는 경제의 최저선이기도 하다. 교부 의무가 흐려지면 임금 산정과 수당 지급의 기준선이 흔들리고, 공정경쟁은 왜곡된다. 대기업에만 관대한 선례가 굳어질 경우, 협력사·하청·중소기업으로 왜곡이 전이되어 ‘규범을 지키는 기업’이 역으로 불이익을 받는 역선택이 발생한다. 이는 산업 경쟁력의 잠식으로 직결된다. 노동행정은 친기업·반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법의 예측 가능성과 동일 적용이 곧 친시장이다.

해법은 어렵지 않다. 첫째, 특별근로감독과 전수점검이 필요하다. 개인별 교부 이력, 서명 절차의 적법성, 임금 산식과 지급 내역을 표본이 아니라 전체로 확인해야 한다. 둘째, 문제의 유권해석이 어떤 경위로 만들어졌는지 결재 라인과 검토 기록을 전면 공개하라. 유사 사건에 적용할 표준 해석도 함께 천명해야 한다. 셋째, 고용부·개인정보위·공정위·국세청·감사원과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합동 진상조사를 가동하라. 다학제 점검만이 구조적 관행을 드러낸다. 넷째, 공익신고자 보호 패키지를 즉시 적용하고, 불이익 조치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을 제도화하라. 다섯째, 전자 교부 기준을 법령·고시·가이드라인에 명확히 법정화하라. 근로자 지정 매체로의 송달, 다운로드·영구 보관 가능성을 충족해야 ‘교부’다. 사내망 열람만으로는 ‘고지’에 그친다.

기업도, 정부도 답해야 한다. SK하이닉스는 실제로 근로계약서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개인에게 교부했는지 자료로 설명해야 한다. 사내 시스템 열람이 전부였다면 근로자의 보관권은 어떻게 보장했는가. 고용노동부는 해당 유권해석의 법적 근거와 절차, 책임 주체를 분명히 하라. 다른 기업에도 동일 기준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만의 예외였는가. 침묵은 의혹을 키운다.

이번 사안은 특정 기업을 겨냥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법의 문턱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시험대다. 문턱을 낮춘다고 모두가 편해지는 것이 아니다. 문턱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약자의 권리이고, 그 다음은 시장의 신뢰다. “열람이 곧 교부”라는 한 줄 해석이 역사적 선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어적 해명도, 정치적 공방도 아니다. 자료 공개·전수 조사·표준화된 기준이다. 법의 최저선을 지키는 일, 그것이야말로 기업의 명예와 행정의 신뢰, 시장의 공정성을 동시에 지키는 가장 값싼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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