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합의, 안보 청구서를 받아든 한국 경제
3,500억 달러 투자와 핵잠수함 연료, 실리 외교의 명암
[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 모인 양국 정상의 표정은 밝았다. 10월 29일 늦은 밤 긴급 브리핑에서 발표된 한미 관세협상 타결 소식은, 수년간 한국 경제를 짓눌러 온 '트럼프 리스크'가 마침내 종결되었음을 알렸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는 순간, 재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악수에 담긴 3,500억 달러라는 숫자의 무게를, 우리는 과연 정확히 가늠하고 있는가.
■불확실성의 종식?
이번 합의의 가장 큰 성과는 '예측 가능성의 확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 기업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관세 폭탄 앞에서 투자를 주저해왔다. 자동차, 철강, 반도도체 등 주력 수출품이 모두 고율 관세의 사정권 안에 놓여 있었다. 기업들은 공장 증설도, 신규 채용도 멈췄다. '불확실성'이라는 괴물이 경제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제 그 괴물은 사라졌다. 대신 우리 앞에는 명확한 숫자가 놓여 있다. 현금 2,000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분할 투자하고, 1,500억 달러를 마스 프로젝트에 투입한다. 연간 200억 달러씩, 10년간. 정부는 이를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 말한다. 외환보유고가 충분하고, 기업들의 투자 여력도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숫자는 냉혹하다. 3,500억 달러는 약 450조 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의 80%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 막대한 자본이 향후 10년간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다. 국내 R&D에, 청년 일자리에, 미래 산업에 투자되어야 할 돈이 태평양을 건너간다. '경제 보험료'치고는 너무 비싼 것이 아닌가.
■패키지 딜의 이면
정부는 이번 협상이 단순한 경제 협상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핵추진잠수함 연료 공급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원칙적 동의'를 얻어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경제와 안보를 묶은 '패키지 딜'의 성과라는 것이다. 물론 핵잠수함은 한국의 숙원 사업이다. 북한의 핵 위협이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자주 국방 역량 강화는 절실하다. 이 대통령이 "미군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라며 미국을 설득한 논리도 일리가 있다. 동맹국의 자체 방위 역량이 강화되면 미국의 군사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리적 접근이다.
그러나 '원칙적 동의'는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이다. 실제 핵연료 공급까지는 미 의회의 승인, 기술 이전 협상, 안전성 검증 등 무수한 관문이 남아 있다. 현금이라는 확실한 선물을 먼저 주고, 어음을 받아온 형국이다. 더욱이 "방위비 증액과 자체 방위 역량 강화"를 약속했다는 대목에서는, 결국 미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에 굴복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
■마스 프로젝트, 깜깜이 투자의 우려
더 큰 문제는 1,500억 달러 규모의 마스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의 실체는 무엇인가. 정부는 "차세대 기술과 미래 에너지원"이라는 모호한 설명만 내놓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도, 수익 모델도, 위험 분석도 공개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미국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추진되는 고위험 사업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익성이 불투명한 '깜깜이 투자'라면, 2,000억 달러의 현금 지원에 더해 1,500억 달러의 손실까지 떠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수 있다.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사안인 만큼, 투명한 정보 공개와 국회의 철저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10년짜리 족쇄
'10년 분할'이라는 조건을 정부는 '충격 완화' 장치라고 설명한다. 한꺼번에 지불하는 것보다 부담이 적다는 논리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는 향후 10년간, 정권이 바뀌어도 되돌릴 수 없는 족쇄다. 차기 정부도, 그다음 정부도 이 약속에 묶여 있어야 한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도, 국민 여론이 바뀌어도, 매년 200억 달러씩 미국에 송금해야 한다. 신문사설 같은 곳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경주에서의 톱다운 합의는 끝났다. 이제 공은 실무 협상단에게 넘어갔다. 마스 프로젝트의 구체적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핵잠수함 연료 공급을 '원칙적 동의'에서 '구체적 로드맵'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실리 외교의 시험대
이재명 정부는 줄곧 '실리 외교'를 강조해왔다. 이념과 원칙보다 국익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번 경주 합의가 그 실리 외교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적 수출 환경을 확보했으며, 자주 국방의 문도 열었다고 정부는 자평한다. 하지만 실리 외교의 진정한 성과는 지금부터 판가름 난다. 3,500억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이 한국 경제에 '투자'로 돌아올지, 아니면 단순한 '지출'로 소진될지는 후속 협상의 질에 달려 있다. 마스 프로젝트가 한국 기업의 기술력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로 구체화되는지, 핵잠수함 연료 공급이 조기에 가시화되는지를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안보와 경제를 직접 연계하는 '트럼프 시대'의 동맹 관계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안보 청구서'를 받아 들었다. 이 청구서를 기회로 만들지, 부담으로 남길지는 정부의 역량에 달렸다. 경주에서의 악수가 진정한 성과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