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뷰티, 조선까지 전방위 M&A 나서
반년새 1조7000억 쏟아부은 공격경영
생존 위한 체질 개조인가, 무리수인가?

태광산업이 호텔, 뷰티, 조선, 자산운용 등 1조7000억에 달하는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태광산업이 호텔, 뷰티, 조선, 자산운용 등 1조7000억에 달하는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CEONEWS=전영선 기자] "태광산업이 움직이고 있다." 최근 투자은행(IB)과 사모펀드(PEF) 업계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이다. 수십 년간 '은둔의 기업'으로 불리며 보수적 경영을 고수해온 태광산업이 돌연 공격적인 M&A 시장의 큰손으로 변신했다. 호텔부터 화장품, 자산운용, 조선소까지, 불과 반년 사이 추진 중인 인수합병 규모만 1조 7000억 원을 훌쩍 넘는다. 한때 '현금만 쌓아두는 기업'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태광이 왜 갑자기 지갑을 열었을까.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절박한 변신'으로 해석한다. 석유화학이라는 본업의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 태광이 그룹의 미래를 걸고 던진 승부수라는 것이다.

■4개월, 4건의 딜 성사

지난 18일 재계에 따르면 태광산업은 최근 KT&G와 '코트야드 바이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 인수 본계약을 체결했다. 거래 규모는 약 2,5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서울 중심가 남대문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안정적인 수익과 자산 가치 상승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알짜 물건이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태광의 쇼핑 리스트를 펼쳐보면 그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지난 10월, 태광은 애경그룹의 모태인 애경산업 지분 63.13%를 4700억 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케라시스', '에이지투웨니스' 등 유명 화장품 브랜드를 보유한 애경산업 인수로 태광은 단숨에 뷰티·생활용품 시장에 발을 들였다. 같은 시기 태광은 국내 최대 부동산 자산운용사 이지스자산운용 인수전에도 참여했다. 거래 규모는 약 5000억 원으로 알려졌다. 운용자산 규모 30조 원대의 이지스를 손에 넣으면 태광은 그룹 내 금융 계열사와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 가장 파격적인 건 최근의 움직임이다. 태광은 미국 PEF 운용사 TPG와 손잡고 중형 조선사 케이조선(옛 STX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거래 규모는 수천억 원대로 예상된다.

■전혀 다른 산업들, 하나의 전략

언뜻 맥락 없어 보이는 이 인수 대상들에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설명한다. "태광의 M&A는 무작위가 아니다. 석유화학 의존도를 낮추고, 현금 흐름이 안정적인 B2C 사업을 확보하며, 금융·부동산으로 수익원을 다각화하겠다는 명확한 로드맵이 보인다." 실제로 각 인수 건의 전략적 의미를 뜯어보면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애경산업은 '현금 창출원(Cash Cow)' 확보다. 화장품과 생활용품은 경기 변동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고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제공한다. 석유화학의 경기 민감도를 상쇄할 완충장치인 셈이다. 남대문 호텔과 이지스자산운용은 자산 가치와 금융 시너지를 겨냥한 포석이다. 남대문 호텔은 입지가 워낙 좋아 향후 부동산 가치 상승까지 기대할 수 있다. 이지스는 태광 계열 흥국생명·화재와 결합해 대체투자 역량을 강화하는 발판이 된다. 케이조선 인수 추진은 가장 과감한 베팅이다. 최근 조선업 호황에 더해, 미국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인 '마스가(MASGA) 프로젝트' 수혜를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 태광의 소재 기술과 조선업의 결합이라는 시너지 창출 가능성도 있다.

■본업의 위기가 부른 DNA 혁신

태광산업이 호텔, 뷰티, 조선, 자산운용 등 1조7000억에 달하는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태광산업이 호텔, 뷰티, 조선, 자산운용 등 1조7000억에 달하는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태광산업의 변신을 이해하려면 석유화학 산업의 현주소를 봐야 한다. 중국의 공급 과잉, 글로벌 경기 침체, 친환경 규제 강화라는 삼중고 속에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줄줄이 적자에 신음하고 있다. 태광도 예외는 아니다. 주력인 석유화학과 섬유 부문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한 재계 관계자는 말한다. "과거 이호진 전 회장 시절만 해도 태광은 '현금 부자'로 불렸지만, 그 현금을 쌓아두기만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본업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생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사업추진실, 변화의 사령탑

태광의 변화를 상징하는 조직이 지난 7월 신설된 '미래사업추진실'이다. 태광은 정인철 부사장을 영입해 이 조직을 이끌게 했다. 신사업 발굴과 M&A를 전담하는 컨트롤타워를 세운 것이다. 정 부사장의 영입은 의미심장하다.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핵심 조직을 맡겼다는 것은 태광이 과거의 보수적 경영 기조를 완전히 버렸다는 신호다. 실제로 미래사업추진실 신설 이후 태광의 M&A는 급물살을 탔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분석한다. "태광은 2023년 '향후 10년간 10조 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는데, 당시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그 진정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라 사업 포트폴리오 전면 개조를 통한 '제2 창업' 수준의 변화다."

■2조 원 실탄의 여유

태광의 공격적 M&A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탄탄한 재무 구조다. 태광산업은 전통적으로 '무차입 경영'을 지향해온 알짜 기업이다. 올해 상반기 기준 연결 현금성 자산은 약 2조1700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SK브로드밴드 지분 매각 등을 통해 추가 유동성도 확보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말한다. "태광은 국내 기업 중에서도 현금 보유액이 손꼽히는 수준이다. 1조7000억 원 규모의 M&A를 진행해도 재무 건전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신용평가사들도 태광의 재무 안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부채비율이 낮고 현금 흐름이 양호해 대규모 투자 여력이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승자의 저주' 경고음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가장 큰 걱정은 '승자의 저주'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이종 산업을 인수할 경우 경영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경영 컨설턴트는 경고한다. "M&A는 인수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문제는 인수 후 통합(PMI)이다. 화장품, 호텔, 금융, 조선이라는 전혀 다른 산업을 동시에 관리하려면 엄청난 경영 역량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소화불량에 걸릴 수 있다." 실제로 4건의 M&A가 동시에 성사되면 1조7000억 원 이상의 자금이 일시에 묶인다. 아무리 현금 부자라 해도 유동성 관리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주주 형평성 논란

최근 애경산업 인수 과정에서 불거진 주주 형평성 논란도 숙제다. 태광은 경영권 지분에만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소액주주 지분 공개매수는 배제했다. 이에 일부 소액주주들이 "차별적 대우"라며 반발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지적한다. "태광이 ESG 경영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주주 형평성 문제에서는 구시대적 행태를 보였다. 이는 향후 다른 M&A에서도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소다."

■태광의 미래, 두 가지 시나리오

낙관론, 복합 기업으로의 화려한 변신

긍정적 시나리오는 명확하다. 태광이 M&A를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성공적으로 재편하고, 각 계열사 간 시너지를 창출해 '제2의 도약'을 이루는 것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전망한다. "태광이 인수한 기업들은 모두 각자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자산들이다. 이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면 석유화학 의존도를 대폭 낮추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갖춘 복합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 10년 뒤 태광의 모습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특히 B2C 사업 확대는 태광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도 있다. 지금까지 태광은 일반 소비자에게는 생소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화장품, 호텔 같은 소비재 사업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면 기업 가치 평가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관론, 무리한 확장의 부메랑

반대로 부정적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급속한 확장이 부메랑이 되어 그룹 전체의 경영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한 M&A 전문가는 우려한다. "역사적으로 단기간에 무리하게 확장한 기업 중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한 사례가 더 많다. 특히 본업과 전혀 관련 없는 사업으로 진출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부지기수다. 태광이 과연 화장품과 조선업을 동시에 잘 경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동성 위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인수한 기업들이 기대만큼 실적을 내지 못하고, 동시에 본업인 석유화학 경기마저 악화되면 자금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변태의 시간, 증명의 시간

태광산업이 호텔, 뷰티, 조선, 자산운용 등 1조7000억에 달하는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태광산업이 호텔, 뷰티, 조선, 자산운용 등 1조7000억에 달하는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태광산업은 지금 창사 이래 가장 격렬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은둔'과 '보수'의 이미지를 버리고, 공격적 M&A로 미래를 개척하려 한다. 1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으며 그리는 청사진은 명확하다. 석유화학이라는 낡은 껍질을 깨고, 소비재·금융·부동산·중공업이 조화를 이루는 복합 기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청사진과 현실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다. 태광의 성공 여부는 결국 실행 역량에 달렸다. 인수한 기업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통합하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각 산업의 특성에 맞게 경영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시장은 기대와 우려의 시선으로 태광을 지켜보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한국형 GE를 꿈꾸는 야심찬 도전"이라고 평가하고, 다른 이들은 "무모한 확장의 위험"을 경고한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태광산업은 더 이상 과거의 태광이 아니라는 점이다. 은둔의 시대는 끝났고, 변화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 변화가 '성공적 변태'로 이어질지, 아니면 '무리한 확장의 실패'로 기록될지는 앞으로 5년이 결정할 것이다. 10조 원 베팅의 승부수,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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