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의 혼과 경영자의 혜안이 빚어낸 'HBM' 신화 주역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CEONEWS=배준철 기자] 반도체는 차갑다. 실리콘 웨이퍼의 표면은 냉정하리만치 매끄럽고, 그 위를 흐르는 전자는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차가운 물질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 세상의 문명을 바꾸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 '반도체 장인'이라 부른다. 여기, 지난 30여 년간 오직 반도체라는 한 우물을 파며, 가장 어두웠던 불황의 터널을 가장 화려한 기술의 빛으로 뚫고 나온 인물이 있다. 엔지니어의 정교함과 승부사의 기질을 동시에 갖춘 리더, SK하이닉스 곽노정 사장이다. CEONEWS가 그를 'TOP CEO'로 선정한 것은 단순히 숫자로 대변되는 실적 때문만은 아니다.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에 대한 천착, 그리고 미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그것이 우리가 주목한 진정한 이유다.

■실리콘 웨이퍼 위에서 피어난 30년 외길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곽노정 사장은 뼛속까지 '하이닉스맨'이다. 1994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입사한 이래, 그는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고려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정통 엔지니어로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미세공정의 한계와 싸우며 10나노급 D램 개발을 주도했고, 수율(Yield)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서 매번 승전보를 울렸다. 그를 아는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곽 사장은 문제의 답이 회의실이 아닌 팹(Fab)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공정 및 제조 기술 전문가로서 그가 쌓아온 내공은 SK하이닉스가 단순한 제조 기업을 넘어 '기술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2022년 3월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의 시선은 항상 기술의 최전선을 향해 있었다. 임원 회의에서도 공정 데이터를 직접 분석하고, 현장 엔지니어들과 기술 토론을 벌이는 그의 모습은 이미 업계에서 유명하다.

■혹한기를 기회로 바꾼 승부수, HBM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이 1월 4일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에서 곽노정 대표로부터 HBM웨이퍼와 패키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이 1월 4일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에서 곽노정 대표로부터 HBM웨이퍼와 패키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2023년, 반도체 업계는 유례없는 혹한기를 맞이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수요 부진으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감산과 투자 축소를 외칠 때, 곽노정 사장은 침묵 속에서 칼을 갈았다. 그는 위기가 곧 기회임을 직감했다. 바로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였다. 모두가 "D램은 끝물"이라고 우려할 때, 그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HBM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차세대 메모리다. AI 학습과 추론에 필수적인 이 기술에 그는 회사의 미래를 걸었다.

엔비디아(NVIDIA)를 필두로 한 AI 가속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SK하이닉스는 시장이 요구하는 최고 사양의 HBM3와 HBM3E를 적기에 공급할 수 있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엔지니어 곽노정이 가진 '기술적 확신'과 CEO 곽노정이 내린 '전략적 결단'이 빚어낸 필연이었다. 그 결과는 경이로웠다. 2023년 7조 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기록하던 회사는 2024년 역대 최대 실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SK하이닉스는 만년 2등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AI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이자 절대 강자로 우뚝 섰다. 이는 단순한 실적 개선이 아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을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바꾼 역사적 전환점이다.

■소통과 안전, '원팀(One Team)'의 리더십

젊은 CEO 곽노정 대표가 고려대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비전과 인재 육성'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젊은 CEO 곽노정 대표가 고려대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비전과 인재 육성'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곽 사장의 리더십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사람'이다. 그는 3만여 명의 SK하이닉스 구성원을 '원팀'으로 묶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다. 강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기보다, 부드러운 소통으로 조직의 온도를 높이는 리더. 그것이 곽노정 스타일이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안전'과 '행복'을 강조했다. "다치면서 만들어야 할 반도체는 없다"는 그의 지론은 24시간 가동되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현장 직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복잡한 기술적 난제 앞에서는 치열하게 토론하되, 구성원의 고충에는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그의 '스킨십 경영'은 SK하이닉스 특유의 끈끈한 조직문화를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학자적 면모도 그의 강점이다. 미래 인재 양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산학 협력을 강화하고, 우수 인재 영입에 직접 발로 뛰는 모습에서 기업의 100년 대계를 고민하는 경영자의 진심이 엿보인다.

■대한민국 반도체, 다시 비상하다

오로지 SK하이닉스에서만 근무한 '하이닉스맨' 곽노정 대표가 직원들과 특별 대담을 하고 있다.
오로지 SK하이닉스에서만 근무한 '하이닉스맨' 곽노정 대표가 직원들과 특별 대담을 하고 있다.

CEONEWS가 곽노정 사장을 'TOP CEO'로 선정한 배경에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 산업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는 평가가 깔려 있다. 미중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파고 속에서, SK하이닉스는 HBM이라는 '초격차 무기'를 쥐고 세계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곽노정 사장은 "토털 AI 메모리 프로바이더(Total AI Memory Provider)"로서의 비전을 천명했다. D램을 넘어 낸드플래시, 그리고 차세대 패키징 기술까지 아우르는 그의 청사진은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12단 HBM3E 양산에 성공하며 기술 격차를 더욱 벌려놓았다. 물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경쟁자들의 추격은 매섭고, 기술의 진보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반도체의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낸 '메모리의 연금술사' 곽노정이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묵묵히 팹을 걷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는 기계 소리가 윙윙거리는 현장이 더 편안하다는 천생 엔지니어. 차가운 실리콘에 뜨거운 혼을 불어넣는 장인. 곽노정 사장이 써 내려가는 SK하이닉스의 드라마는 이제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빚어질 다음 혁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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