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혜안으로 'Mi-RAE'라는 대양을 항해하다
[CEONEWS=전영선 기자]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격변의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격변 그 자체가 아니라, 지난날의 논리로 대응하는 것"이라 설파했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IT 전방 산업의 침체, AI라는 거대한 문명적 전환이 동시에 몰아치는 초불확실성의 시대. 대한민국 부품 산업의 자존심 삼성전기의 키를 쥔 장덕현 사장은 단순히 파도를 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파도의 힘을 이용해 삼성전기를 '모바일 부품 제조사'라는 좁은 항구에서 '미래 기술 플랫폼 기업'이라는 대양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 '근본'을 꿰뚫는 엔지니어의 통찰
장덕현 사장을 수식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다.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학·석사를 거쳐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경영자이기 이전에 뼛속까지 엔지니어다. 2009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컨트롤러 개발팀장을 시작으로 시스템LSI사업부 개발실장, 센서사업팀장 등 시스템반도체의 심장부를 두루 거친 이력은 화려하다 못해 견고하다. 2021년 삼성전기 사장 부임 당시, 재계의 시선은 '반도체 전문가가 왜 부품 회사를 맡았는가'에 쏠렸다. 하지만 이는 우문이었다. 부품과 세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경계가 무너지는 4차 산업혁명의 길목에서 부품의 언어를 반도체의 문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리더는 오히려 장 사장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취임 일성으로 "엔지니어링 본질에 집중하라"고 주문한 그는 화려한 수사보다 기술적 '초격차'만이 생존의 담보라는 철학을 전파했다. 부품 하나를 보더라도 완제품 안에서의 작동 원리와 고객 가치를 시스템적 사고로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삼성전기가 단순 하청 업체를 넘어 고객사와 대등한 기술 파트너십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모바일을 넘어 'Mi-RAE'를 설계하다
장덕현 사장의 경영 나침반은 명확히 '탈(脫) 모바일'을 가리킨다. 그동안 삼성전기의 실적은 갤럭시 시리즈의 흥행 여부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왔다. 이 천수답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그가 꺼내 든 카드가 'Mi-RAE' 프로젝트다. Mobility(전장), IT(AI/서버), Robot(로봇), AI(인공지능), Energy(에너지)의 앞 글자를 딴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닌 미래 먹거리를 향한 생존 전략이다. 특히 전장 분야에서의 성과가 눈부시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는 자동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전장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부산과 톈진을 전진기지로 삼았다. 전장용 MLCC와 고성능 카메라 모듈은 이제 삼성전기의 확실한 캐시카우로 자리 잡았으며, 모바일 침체기에 전장 부문이 든든한 버팀목이 된 것은 장 사장의 선구안이 적중했음을 증명한다.
■'유리기판', 꿈을 현실로 빚어내다
진정한 승부사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베팅한다. 2024년, 장덕현 사장은 '유리기판(Glass Substrate)'이라는 화두를 전 세계 반도체 패키징 시장에 던졌다. AI 반도체 성능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면서 기존 플라스틱 기판이 열 배출과 미세 회로 구현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이 난제를 해결할 차세대 소재로 유리가 주목받았다. 기술적 난이도 탓에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던 상황에서 장 사장은 CES 2024 무대에서 유리기판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하며 "2026년 양산"이라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수십 년간 축적한 MLCC 기술과 기판 제조 노하우가 융합된다면 승산이 있다는 냉철한 계산이었다. "AI 시대, 기판은 더 이상 조연이 아니다. 반도체의 성능을 결정짓는 주연이다." 그의 이 한마디는 부품업을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꿨다. 유리기판을 통해 삼성전기를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 플레이어로 올려놓으려는 것, 이것이 그가 그리는 '플랫폼 기업' 비전의 정점이다.
■ '썰톡'으로 빚어낸 수평의 미학
냉철한 기술자의 이면에는 '소통의 달인'이 있다. 매주 목요일 열리는 '썰톡(Thursday Talk)'은 그의 리더십을 상징하는 시그니처다. 딱딱한 훈시 대신 마이크를 잡고 직원들과 맛집 이야기부터 회사의 미래까지 격의 없이 대화한다. 사장실의 문턱을 낮추고 직급을 파괴한 이 소통의 시간은 보수적인 제조 기업 특유의 경직된 문화를 녹여냈다. "직원이 행복해야 기술도 나온다"는 그의 지론은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 MZ세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경청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 벤처 문화를 장려한다. 비전을 공유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의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도 삼성전기가 흔들리지 않는 원동력이다.
■숫자로 증명한 전략, 창사 최대 실적의 쾌거
장 사장의 'Mi-RAE' 전략은 이제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창립 52주년을 맞은 2025년, 삼성전기는 3분기 연결 기준 매출 2조8890억 원, 영업이익 2603억 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분기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0.5%, 영업이익은 15.7% 증가한 수치다. 사업 부문별로 보면 컴포넌트 부문 매출이 1조3812억 원으로 전년 대비 15% 성장했다. ADAS(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 확산과 AI 서버 수요 증가로 산업·전장용 MLCC 공급이 크게 늘었다. 패키지솔루션 부문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 대상 서버용 FC-BGA 공급 확대로 5932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광학솔루션 부문도 전장용 카메라 모듈 성장에 힘입어 9146억 원을 달성했다.
2023년 창립 50주년 당시 장 사장이 천명했던 "매출 20조 원, IT 부품 산업 톱티어 도약"이라는 목표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음을 이번 실적이 증명한다. AI, 전장, 서버라는 세 개의 성장 엔진이 본격 가동되면서 삼성전기는 모바일 의존도를 낮추고 체질 개선에 성공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항해
취임 4년 차, 장덕현 사장이 이끄는 삼성전기는 분명 과거와 다르다. AI와 전장이라는 쌍두마차를 앞세워 '부품업계의 삼성전자'가 아닌 독자적인 '초일류 테크 기업'으로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혹자는 그의 목표가 무모하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반도체의 미세 공정을 뚫어보던 혜안이 이제 거대한 산업의 흐름을 읽고 있기에, 그 도전은 결코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기술로 현재를 다지고, 혜안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장덕현 사장. 그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삼성전기의 새로운 100년이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또 다른 신화가 되기를 기대한다.
